명 칭 : 죽주산성(竹州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 일원
지 정 일 : 1973.07.10
소 재 지 : 경기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산106
시 대 : 고려시대
소 유 자 : 사유
관 리 자 : 안성시
이 성은 고려 시대에 죽주성으로 불렸으며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곳이다. 죽주는 청주와 충주의 두 길이 만나는 중부 내륙교통의 중심지였다.
고려 고종 23년(1236) 몽고군이 이곳 죽주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면서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때 성을 지킨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는 일찍이 귀주성(歸州城) 싸움에서 몽고군의 공격법을 알고 있어 대비하였기에, 백성들은 그를 귀신 또는 신명(神明)이라 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강조되어 성을 보수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진을 치기도 하였다.
죽주산성은 내성, 본성, 외성의 중첩된 성벽 구조를 갖추고 있다. 원래의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외성뿐이고 내성과 본성은 훼손이 심하게 되었기 때문에 성벽의 구조를 통하여 만든 시기를 추정하기 어렵다.
현재 성의 둘레는 1,688m이고, 높이 2.5m 안팎이며 부분적으로 수리를 많이 하였다. 남쪽 성벽의 동쪽 성벽의 북쪽 끝에는 성벽의 양쪽 끝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치성(雉城)이 남아 있으며, 남문 쪽 성 바깥에는 도랑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북문 옆에는 네모진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성안에는 몽고 침입 때 큰 전과를 올린 송문주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주산성은 신라 개산군의 치소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고려 시대에는 죽주의 치소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성은 해발 370미터인 비봉산 아래 위치하였으며, 본성1690미터, 외성1500미터, 내성270미터의 3겹으로된 석성이고 사대문지와 장대문지가 남아 있다. 성의 축조연대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삼국시대에 축조된것으로 믿어지며, 고려시대에는 이를 보강하여 수축하고 방호별감을 두었고, 조선시대 다시 성을 보수한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이 성안에는 고려고종 19년(1232) 몽고병이 각종 공성무기와 계략으로 이 성을 함락시키려고 침입하였을때 주민들과 함께 격퇴한 숙주 방호별감 송문주 장군 전공영각이 있다.
죽주산성의 복원에 대하여
2010년 11월 24일
중원문화권에 속하는 옛 죽산현이었던 안성의 죽주산성을 다녀왔다.
죽주산성에서는 충주와 청주에서 올라온 길이 분기되고 북으로는 서울로,
동으로는 안성을 지나 서해로 이어져 중국으로 향한다.
특히 죽주산성은 신라말의 양길과 궁예의 본거지이며
더블어 송문주장군의 승전지이기도 하다.
죽산의 죽주산성은 율면의 망이산성과 장호원의 설성산성 등과 연계되며
남한강 지류인 청미천과 양화천과 복하천이 흐르는 여주,이천에 속하던 곳이다.
이 산성은 작게는 죽산현에 속하지만, 크게보면 안성보다는 여주와 이천지역이다.
또한 역사적. 지리적인 면에서 경기도 안성보다는 중원문화권에 속해 있다.
죽주산성을 오르면서 보이는 동문과 산성복원현장을 보며
무언가가 어색하고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본래, 성이라는 것이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천에 따라 축조되고 폐쇄되는 것이지만,
그 지역의 자연석과 그 시대의 축성법과 축성의 주체에 따라
그 성의 특색과 시대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즈음에 진행되는 성곽복원공사는 성곽을 복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곽의 형태만 만들어 놓은 것인지 한심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역사적 고증도 없이 복원공사를 추진하지는 않을 것같은데,
죽주산성의 복원공사 구간을 보면
본래의 화강석이 아니라 절리가 잘되는 점판암으로 복원되어 있다.
또한 석축의 축성기법과 축성에 쓰이는 석재의 형상도
기존의 성벽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죽주산성을 내려오면서
산성 입구의 바위들에게
씁쓸한 미소를 띄워본다.
성곽을 복원하던서
조금 더 시간이 걸리고,
조금 더 예산이 들더라도
~~~~
죽주산성에는 중원문화권 산성에는 없는 포루가 있다.
죽주산성의 기록을 보면 대몽항쟁 시에
포탄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현재의 포루가 고려 때에 축조된 것이라면
이는 신중한 고증과 복원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또한 산 정상의 내성을 복원 시에는
원형을 잘 보존하여 복원했으면하는 바램이다.
(죽주산성 종합 안내도)
(죽주산성 안내문)
(죽주산성 동문 입구의 바위)
(죽주산성 동문 전경)
(죽주산성 동문 남측 성벽)
(죽주산성 동문 남측 성벽보수 구간)
(죽주산성 내성 석벽)
(죽주산성 북측 성벽)
(죽주산성 성벽보수 구간 상부)
(죽주산성 성벽보수 구간 상부)
(죽주산성 서측 성벽 전경)
(죽주산성 남측 성벽 상부)
(죽주산성 남벽포루터)
(죽주산성 남측 성벽보수 구간)
(죽주산성 남측 성벽 석축보수)
(죽주산성 동문과 동측 성벽 전경)
(죽주산성 발굴지 전경)
(죽주산성 동측 성벽보수공사 현장)
(죽주산성 동측 성벽보수공사 현장)
(죽주산성 동측 성벽보수공사 현장)
참고자료 -【신증동국여지승람】제8권 / 경기도京畿道 |
죽산현竹山縣 |
동쪽으로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22리, 남쪽으로 충청도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26리, 서쪽으로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3리, 북쪽으로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49리, 서울까지 1백70리다. 건치연혁 본디 고구려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가 개산(介山)이라 일컬었다. 고려 초에 죽주(竹州)로 고쳤고, 성종(成宗)이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이 없앴다.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에 붙였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감으로 만들었다. 무릇 군(郡)과 현(縣)의 이름이 주(州)나 자(字)를 가진 곳은, 도호부 밑으로는 모두 산(山)과 천(川)의 글자로 갈음하여 부(府)나 목(牧)과 구별하였다. 죽산이란 이름도 이와 같다. 세종 16년에 충청도에서 옮겨 경기도에 붙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한 사람씩이다. 군명 개차산(皆次山)ㆍ개산(介山)ㆍ음평(陰平)ㆍ연창(延昌)ㆍ죽주(竹州). 성씨 본현(本縣) : 최(崔)ㆍ안(安)ㆍ양(梁)ㆍ이(李)ㆍ유(庾)ㆍ민(閔)ㆍ김(金)ㆍ박(朴)ㆍ음(陰). 산천 건지산(巾之山) : 현 북쪽 40리에 있다. 정배산(鼎陪山) : 현 북쪽 15리에 있다.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돌을 이고 있는데, 그 돌 구멍에 사는 흰 뱀이 해마다 큰물이 질 때를 틈타 천민천에 내려오기에 사람과 짐승의 우환이 되었다. 칠현산(七賢山) : 현 남쪽 15리에 있다. 구봉산(九峯山) : 현 서쪽 22리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 현 북쪽 4리에 있다. 생현(栍峴) : 현 동쪽 15리에 있으며 이천부(利川府) 경계다. 천민천(天民川) : 현 동쪽 10리에 있다. 물이 건지산과 정배산에서 나와, 여주(驪州) 여강(驪江)으로 들어간다. 대사천(大寺川) : 현 남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물이 칠현산과 구봉산에서 나와 천민천과 합친다. 월라정지(月羅井池) : 현 동쪽 10리에 있다. 토산 자기(磁器)ㆍ도기(陶器). 봉수 건지산봉수 : 동쪽으로 충청도 충주(忠州) 망이산(望夷山)에 응하고, 서쪽은 용인현(龍仁縣) 보개산(寶蓋山)에 응한다. 누정 봉서루(鳳棲樓) : 객사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현 서쪽 3리에 있다. 역원 분행역(分行驛) : 현 북쪽 10리에 있다. ○ 고려 김황원(金黃元)이 대간(大諫)이 되어 여러 번 일을 말하다가 임금 뜻에 거슬려 성산(星山) 원으로 나가다 이 역말을 지나게 되었다. 마침 남방에서 돌아온 이재(李載)가 시 지어 주기를, "나뉘어 가는 길인들 어찌 시가 없을쏜가. 머물러 사신에게 주어 생각하는 것을 부치노라. 갈대 잎은 쓸쓸하니 가을 물 나라요, 강산은 아득하고 머니 석양 때로다. 옛사람을 볼 수 없으니 이제 부질없이 탄식하네. 지난 일을 좇기가 어려우니 다만 스스로 슬퍼하노라. 참으로 그렇구나. 죄를 당하여 장사(長沙, 한나라 '가의'가 젊어 장사로 귀양갔다.)로 귀양가는 손이, 관직은 낮고 나이는 늙어 귀밑털이 세었도다." 하였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누른 진흙 벽 뒤에 옛날의 시를 남겼더니, 뭉개져 자국 없어 기억할 수 없네. 수양버들은 아직도 일찍이 가던 길에 늘어졌고, 강산은 오히려 옛날 놀던 때와 같구나. 젊은 미인은 어디 있는가. 부질없이 추억하네. 흰 머리로 두 번 오니 못내 슬프기만 하구나. 비록 부절(符節, 사신 증표)을 갖고 다른 해에 이르더라도, 누에 오를 만한 근력이 먼저 쇠할까 두렵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청사로 가려 놓은 한 수 시를 읽어 파하고, 인간 만사를 시험 삼아 곰곰이 생각하네. 만일 후진(後進)이 선진(先進)을 따르는 것을 잊는다면, 모름지기 지금 때를 가지고 예전 때를 배우라. 관직이 오르지 못함을 어찌 탄식하랴. 귀밑털이 쓸쓸한 것도 슬퍼할 게 없네. 평생에 다만 하늘이 장차 무너뜨릴까 두려워하여, 초나라 손이 미친 듯이 봉(鳳)의 덕이 쇠함을 노래하였네." 하였다. ○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저물녘에 영곡봉(靈鵠峯) 앞길을 지나, 아침에는 분행루(分行樓) 위에 이르러 읊조리네. 꽃은 벌의 수염을 접하여 붉은 것을 반쯤 뱉고, 버들은 꾀꼬리 날개를 감추어 푸른 것이 처음으로 깊도다. 한 툇마루의 봄빛은 무궁한 흥이요, 천 리의 사신은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로다. 머리를 중원(中原)으로 돌이키매 사람은 보지 못하는데, 흰 구름은 땅에 나직하고 나무는 찝찝하도다." 하였다. 좌찬역(佐贊驛) : 현 북쪽 50리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성을 나온 것을 알조라 몇 날인고, 길에 오르니 서늘한 하늘이 기쁘도다. 곤곤(袞袞)하게 세월이 빠르고 쓸쓸하게 비바람이 연하였도다. 공명(功名)은 말 등 위에서 수고로웠고, 돌아갈 뜻은 갈매기 옆에 떨어지네. 이미 부귀도 구할 수 없으니, 억지로 채찍 잡는 것을 말하지 마라." 하였다. 태평원(太平院) : 현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 현 동쪽 20리에 있다. 통리원(通梨院) : 현 남쪽 20리에 있다. 장항원(獐項院) : 현 서쪽 20리에 있다. 이원(梨院) : 현 서북쪽 15리에 있다. 불우 칠장사(七長寺) : 칠현산에 있다. ○ 신우(辛禑) 9년에 왜적이 함부로 나라 안까지 깊숙이 들어오므로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감추어 둔 사적(史籍)을 여기에다 옮겼다. ○ 권근(權近)이 수찬(修撰) 배중원(裵仲員)을 보내 사적을 포쇄(曝晒, 바람 쐬고 볕에 바램)하는 서문에, "우리 조선이 바다 동쪽을 차지한 지 수백 년에, 처음에는 국사(國史)를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감추었는데 대개 후세에 난리를 만나 잃어버릴까 걱정해서다. 가야산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멀고 험하며 해인사는 가야산에서 가장 궁벽하고 깊이 막혔기에, 나라에 비록 변이 있어도 난이 일찍이 미치지 않았으나 조종의 염려는 매우 깊었다. 요즘은 왜적을 억눌러 다룰 기율을 잃어, 깊이 들어와 주와 현을 도둑질하므로 가야로는 거의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홍무(洪武) 기미년 가을에 그 사적을 선산(善山) 득익사(得益寺)로 옮겼고, 신유년 가을에 조령(鳥嶺)을 넘어 북쪽으로 와서 충주 개천사(開天寺)로 왔으며, 이번 계해년 여름에 왜적이 또 충주 옆 고을을 쳐들어오자 7월에 또 죽주 칠장사로 옮겼으니, 땅의 험하고 먼 것도 믿을 수가 없다. 적이 감히 깊이 들어옴이 이와 같으니 아, 이것으로 세상이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하였다. 비족사(飛足寺) : 구봉산에 있다. 장광사(長光寺)ㆍ지통사(智通寺) : 모두 비봉산에 있다. 응석사(凝石寺) : 생현 서쪽에 있다. 고려 명종(明宗)이 임금이 되기 전에 소향사(燒香使)로 이 절에 이르렀다. 절 중의 꿈에 태조(太祖)가 명종에게 아홀(芽笏) 하나를 주고, 아울러 시를 주기를, "네게 아홀 하나를 주노니, 법사(法師)가 모시며 떠나지 않으리라. 거년(居年)은 구구구(九九九)요, 향위(享位)는 칠칠이(七七二)다." 하였는데, 명종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에 임금에 오른 지 28년이 되던 해에 최충헌(崔忠獻)이 폐하게 되었으니, 그 응험(應驗)이 틀리지 않았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 북쪽 3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총묘 박원형(朴元亨)묘 : 현 북쪽 15리에 있다. 안규(安珪)묘 : 현 서쪽 10리에 있다. 고적 죽주고성(竹州古城) : 현 동쪽 5리 되는 태평원 북쪽에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3천8백74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 고종(高宗) 13년에 송문주(宋文冑)가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었는데, 몽골이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하라 하므로 성 안 군사가 나가 쳐서 쫓았다. 몽골이 다시 포로 성의 사면을 공격하자 성문이 곧 무너졌으나, 성에서도 또한 포를 가지고 마주 공격하자 몽골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몽골은 또 사람의 기름을 짚에 붓고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 안 군사가 한꺼번에 문을 열고 돌격하니, 죽은 몽골 군사를 이루 셀 수 없었다. 몽골은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무너뜨리지 못했다. 문주가 구주(龜州)에 있을 때 몽골 성을 공격하는 술책을 익히 알았기에 몽골 계획을 먼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문득 군사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적이 반드시 아무 기계를 쓸 테니 우리는 마땅히 아무 기계를 마련해 싸워야 한다." 하였다. 참말로 적이 이르러 그 말과 같으니 모두 귀신이라고 하였다. 만선사(萬善寺)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절은 푸른 풀에 싸여 어둑하고, 길은 푸른 덩굴에 감겨 깊숙하다. 골이 좁으니 한가한 구름이 모이고, 정원이 거치니 모진 불길이 침노한다. 새벽바람에 목탁 소리 잦고, 저녁 달은 못 가운데 잠겼도다. 푸른 산아 잘 있어라, 벼슬 그만두면 다시 찾아오련다." 하였다. 연창관(延昌館) :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내가 편평하니 들이 넓음을 알겠고, 꽃이 떨어지니 봄이 깊음을 깨닫도다. 나그넷길 연창관 소나무 바람이 내 꿈을 맑혀 준다." 하였다. 봉업사(奉業寺) : 비봉산 아래에 있다. 고려 때 태조를 그린 그림을 모셨는데, 공민왕(恭愍王) 12년 2월에 임금이 청주(淸州)를 떠나 이 절에 들러 진전에 참알(參謁)하였다. 지금은 돌 탑만 남았다. 명환 고려 서원(徐遠) : 정치한 공적이 있어 지금까지 칭송하고 사모한다. 송문주(宋文冑) : 죽주고성을 보라. 인물 고려 박인량(朴寅亮) : 문종(文宗) 때 과거에 올랐다. 요나라가 일찍이 압록강(鴨綠江)을 지나 경계를 넘어오려 하자 문종이 사신을 보내 그만두기를 청하였는데, 인량이 진정표(陳情表)를 짓기를, "넓은 하늘 밑이 임금의 땅 임금의 신하 아님이 없는데, 한 자 남짓한 땅을 무얼 반드시 내 영토니 내 다스림이니 하랴."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문양(汶陽)의 옛 밭을 돌려주었으니 피폐한 고을을 어루만져 편안히 한 것이요, 장사(長沙)의 졸(拙)한 소매를 돌리어서 융성한 때에 뛰고 춤추었다." 하였는데, 요나라 임금이 이 글을 보고 그 일을 그쳤다. 숙종(肅宗) 때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박경인(朴景仁) : 인량 아들이다. 젊어서는 힘써 배워 과거에 올랐고, 여러 번 옮겨 좌습유(左拾遺)가 되었는데 언론이 강하고 곧아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일이 없으니, 그때 의논이 중하게 여겼다.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에 이르고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박경백(朴景伯) : 경인 아우다. 선종(宣宗) 때 장원으로 과거에 뽑혀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박경산(朴景山) : 경백 아우다. 예종(睿宗) 때 과거 제이명(第二名)으로 뽑혀 대경(大卿)에 이르렀다. 박서(朴犀) : 고종(高宗) 때 사람인데 구주성(龜州城)을 지킨 공이 있었다. 벼슬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구성(龜城)에 자세하다. 박효수(朴孝修) : 본디 맑은 절개와 지조가 있었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윤신걸(尹莘傑)을 대신하여 선비를 뽑았는데, 임금이 그 청백을 아름답게 여겨 은병(銀甁) 쉰 개와 쌀 백 석을 내리고 학사연(學士宴)을 베푸니, 효수의 맑은 절개와 지조가 더욱 나타났다. 뒤에 연창군(延昌君)을 봉하였다. 박전지(朴全之) : 나이 스물이 안 되어 과거에 올랐다.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이름난 선비와 사귀며 고금ㆍ산천ㆍ풍토를 서로 의논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하였다. 원나라에서 정동성도사(征東省都事)를 내렸고, 돌아와서는 충선왕(忠宣王)이 늘 좌우를 물리치고 전지와 더불어 정사를 꾀하고 의논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정승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박원(朴遠) : 전지 아들이다. 숙종 때 과거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우부대언(右副代言)과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박정유(朴挺蕤) : 성품이 너그럽고 넓었다. 숙종 때 과거에 올라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고 시호는 충질(忠質)이다. 안전(安戩) : 젊어 과거에 올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고, 경상ㆍ충청ㆍ서북(西北) 삼도 도지휘사(都指揮使)를 지냈다. 안한평(安漢平) : 벼슬이 문하찬성사 연흥부원군(門下贊成事延興府院君)에 이르고 시호는 양량(襄良)이다. 안극인(安克仁) : 한평의 손자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중대광 우문관 대제학(重大匡右文館大提學)에 이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공민왕(恭愍王) 정비(定妃) 아버지다. 본조 안숙로(安淑老) : 극인 아들이다. 벼슬이 서북면(西北面)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에 이르렀다. 안등(安騰) : 극인 손자다. 도승지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안망지(安望之) : 숙로 아들이다. 벼슬이 함길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안맹담(安孟聃) : 망지 아들인데, 세종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장가들어 연창위(延昌尉)로 봉하였으며 시호는 양효(良孝)다. 박원형(朴元亨) : 과거에 오르고 좌익익대(左翼翊戴) 공신에 참여하고 벼슬은 의정부 영의정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고, 예종(睿宗) 묘정에 배향하였다. 안초(安超) : 과거에 올라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었으므로 마음껏 돕고 공급하여 한 고장이 그 덕으로 온전히 살아났다. 신증 박안성(朴安性) : 원형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안(靖安)이다. 제영 상마세월심(桑麻歲月深) :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산과 물은 구름과 연기가 늙었고, 뽕나무와 삼은 세월이 깊도다. 봄 노래와 나무하는 피리 모두가 태평한 마음이네." 하였다. 계류안안심(溪流岸岸深) : 최사로(崔士老)의 시에, "단비는 시골마다 충분하고, 시내 흐름은 언덕마다 깊도다. 나는 것, 잠긴 것, 움직이는 것, 심어진 것 모두가 한결같이 봄 마음이네." 하였다. [문헌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 연혁 중종(中宗) 38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고, 선조 17년에 현(縣)으로 내렸다가 29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읍호 음평(陰平) -고려 성종(成宗) 때 정했다. 연창(延昌).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 여주진 관병마 동첨절제사(驪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ㆍ수어후영장(守禦後營將)ㆍ토포사(討捕使)를 겸한다. 영아 수어후영(守禦後營) : 인조 때 후영(後營)을 여주에 세웠다가 뒤에 이곳으로 옮겼다. 나중에는 영장(營將)이 본부사(本府使)를 겸하였다. 군병(軍兵)에 딸린 읍은 죽산(竹山)ㆍ여주(驪州)ㆍ음죽(陰竹)ㆍ안성(安城)ㆍ양성(陽城)ㆍ양지(陽智)다. 방면 부내일(府內一) : 끝이 5리이다. 부내이(府內二) : 끝이 10리이다. 서일도(西一道) :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서이도(西二道) :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서삼도(西三道) :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원일도(遠一道) :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원삼도(遠三道)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근일도(近一道)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근삼도(近三道)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천남일도(川南一道)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천남이도(川南二道) :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천북일도(川北一道)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천북이도(川北二道)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산동(山東) : 동쪽으로 22리이다. 산서 : 서쪽으로 25리이다. 산내(山內) : 남쪽으로 20리이다. 산외 : 서쪽으로 20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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