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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월의 정양산성(왕검성)

산골어부 2011. 1. 8. 11:26

영월의 정양산성은 태화산성과 마주하는 산성이다.

태화산성은 정양산성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정양산성 내부가 눈으로도 쉽게 볼 수 있다.

정양산성은 그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산성을 더 높고 견고하게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로인해 정양산성 북사면에 외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정양산성의 축성시기는 고구려 미천왕 때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시대의 정세를 살펴보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또한 정양산성을 왕검성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 시대에는 왜 그렇게 왕검성이 많을까 ?

이는 고구려 수도의 천도에 따라  생겨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도 왕이 머무른 성이나 왕명에 의해 축성되거나,

지명의 왜곡과 혼돈 등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민족의 뿌리인 단군왕검에서 유래한 지명들을 살펴보면

실제 단군이 천제를 지내지 않은 곳에도그에 대한 지명들이 나타나는데,

이는 왕이나 지방호족들이 그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곳에서 멀지않은 태백시의 태백산과 천제단은 왜 생겨났을까 ?

태백산과 함백산의 지명유래와 천제단에 설치된 한배검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낙동강의 발원지인 함백산과 태백산은 신라의 근간을 이루는 산으로

신라가 단군의 자손임을 밝히고, 그들 만의 성지를 만든 것이 아닌가한다.

백두산을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 개경의 구월산, 평양의 묘향산 등

백제가 부여의 자손임을 강조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

유리왕와 온조왕은 부모가 모두 다른 형제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북부여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주장한다.

 

정양산성(왕검성)은 영월에서 경상도로 넘어가는

선달산의 박달령과도 연계된 지명으로도 볼 수 있으며,

그리고, 제22대 정종대왕 태실비와 연관된 지명으로도 보인다.

그에 대한 논란은 ~~~~~

 

정양산성 입구에는 정종(정조)대왕 태실비가 있다.

정종대왕 태실비에 나타난 조선 22대 정종대왕.

조선조 22대는 정조대왕이고, 조선조 2대왕이 정종이다.

정종과 정조에 대한 설명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정조대왕 태실비는 왜 이 먼 곳까지 왔을까 ?

정조대왕 태실에서 바라보는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산과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물.

 

 

정양산성 주차장과 태화산전경

 

정양산성 주차장 내 계족산 등산 안내도

 

정양산성 주차장 내 계족산 등산 안내도

 

정양산성 주차장 내 정양산성 안내판

 

정양산성 주차장 내 정양산성 안내도

 

정양산성 내 정양산성 유래비

 

정양산성 내 발굴조사지 안내도

 

정양산성 입구의 정종대왕 태실비

 

※정종대왕 태실비에 대한 안내

계족산 산행시 만나게 되는 정종대왕 태실비. 조선 22대 정종대왕이라.... 22대는 정조대왕인데.... 이산을 찾아 유심히 살핀 사람이라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지에 세워진 안내판에 분명히 정종대왕 태실비이며 22대 정종대왕이라 표기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22대 정조대왕입니다. 안내판의 내용에도 정종대왕 과 정조가 함께 표기되어 있어 더욱 의구심이 생기게 합니다.

▷ 이에 대해 영월군청에 문의한 결과 22대 정조대왕의 본래의 시호가 정종이었으며, 고종대인 1899년에 정조로 추존되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정종대왕 = 정조대왕이므로 실제 표기에는 별 문제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양산성 입구의 정종대왕 태실비

 

정양산성 입구의 정종대왕 태실비

 

정양산성 입구의 정종대왕 태실비

 

정종대왕 태실비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단종 유배지

 

정양산성 외성터 및 안내판

 

정양산성 외성 안내판

 

정양산성 외성터

 

정양산성 외성터

 

정양산성 외성터

 

정양산성 서측 성벽 및 치성터

 

정양산성 북측 성벽

 

 

정양산성 북측 내측 성벽

 

정양산성 북측 내측 성벽

 

정양산성 북문터에서 바라본 산성 내 발굴지

 

정양산성 북문터 안내판

 

정양산성 북문터

 

정양산성 북문터

 

정양산성 북문터 성벽

 

정양산성 동문 안내판

 

정양산성 동문 안내판

 

정양산성 동문 외측 성벽

 

정양산성 동문 외측 성벽

 

정양산성 동문 외측 성벽

 

정양산성 북문과 동문  전경

 

정양산성 동문에서 바라본 동측 성벽

 

정양산성 동측 치성 정상

 

정양산성 동측 치성 정상

 

정양산성 동측 치성 내측성벽

 

정양산성 동측 치성 내측성벽

 

정양산성 동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동측성벽

 

정양산성 동측 치성에서 바라본 남측 성벽과 남한강

 

정양산성 동측 치성에서 바라본 남측 성벽과 남한강

 

정양산성 남문에서 바라본 서측 치성과 남한강

 

정양산성 남측 성벽에서 바라본  남한강

 

정양산성 남문터 발굴조사중

 

정양산성 남문터 성벽

 

남문에서 바라본 남동측 성벽

 

정양산성 서측 치성터

 

정양산성 서측 치성터 성벽

 

정양산성 서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북측 성벽

 

정양산성 서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북측 성벽

 

정양산성 서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북측 성벽

 

정양산성내 발굴지

 

정양산성내 발굴지

 

정양산성내 발굴지

 

정양산성내 발굴지

 

정양산성내 발굴지

 

정양산성내 발굴지 입구의 돌탑

 

 

참고자료 - 정양산성(영월군청)

영월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4개의 산성중 우두머리 주성(主峸)에 해당되는 고산성(古山峸)으로

영월읍 정양리에 위치하고 있어 정양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정보

  • 지정번호 : 제 446호
  • 지정년월일 : 2003. 6 . 2
  • 규모.양식 : 성지(성곽)
  • 시대 : 삼국시대
  • 소재지 : 영월읍 정양리 산1-1외 8필지
  • 문의처 : 문화관광과 033)370-2531
콘텐츠 메인 사진 입니다.

상세정보

정양산성은 영월읍 정양리의 영월화력발전소 동남단에서 산의 능선을 따라 약 40여분 정도 계족산(鷄足山) 등산로를 오르면 정상부에 위치한다. 정양산성은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축조된 사방이 높고 성안이 움푹 들어간 고봉형(槁峯形)의 산성으로 자연석을 이용한 점판암으로 축조하였다. 영월은 남한강 상류로 충북 단양과 함께 삼국항쟁의 중심지였으므로, 정양산성을 중심으로 태화산성, 대야산성, 온달산성, 완택산성, 고성 등이 연결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영월 고적조(古跡條)에는 「石築周二千三百十四尺高十九尺(석축주이천삼백십사척고십구척)」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 영월 성지조(城池條)에는 「正陽山古城周二千二百十四尺(정양산고성주이천이백십사척)」이라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표기되어 있는 고성이다.
내성은 둘레가 약 1,060m이고, 외성의 길이는 570m 로서 성벽의 총 연장은 1,630m에 이른다. 서문이 정문으로 보이고 동·남·북문지가 모두 잘 남아 있다. 부분적으로 무너진 곳이 있지만 전체적인 성벽의 잔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북문의 경우는 양쪽 문지가 그대로 잘 남아있다. 성곽은 내성과 외성 및 차단 벽을 갖춘 것으로 밝혀지게 되고, 현문(懸門)구조를 갖추고 성벽이 현저히 꺾이는 곳의 외측에 치성(雉城)과 곡성(曲城)을 두어 각루(角樓)처럼 이용하였다.
산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로 보건데 축조 시기는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투던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는 이미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이후 수축을 거쳐 조선 초까지 산성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한림대학교박물관, 1985, 《중원 문화권 유적정밀지표조사보고서》 영월군편;
한림대학교박물관·강원도·영월군, 1995,《영월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영월군, 1995; 영월군·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0, 《영월 왕검성(王儉城)》.

 

참고자료 - 영월읍 정양리 지명유래

 

정양리 지도 이미지입니다.

태봉(胎峰)

정양리 발전소 뒤 동북쪽에 있다. 계족산(鷄足山)의 지맥이 뻗어내려 정양리에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의 명당인 태봉(胎峰)을 이루었다. 실제로 이곳에는 조선 22대 정조임금의 태(胎)를 묻은 태실(胎室)이 있었다. 즉, 정양리는 임금의 태를 묻고 태실비(胎室碑)를 세울 정도로 유명한 명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양리의 서쪽에 있는 '묘족리(描足里)'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고양이가 앞발을 치켜들고 황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정양리를 해치려는 형상을 하여 그곳을 일컬어 '사살곳'이라 부르고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명당 자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묘족리(描足里)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아홉 개의 봉우리를 구개(아홉 마리의 개)라 칭하고 묘족리(描足里)라는 지명도 괴안리(槐安里)로 고쳐서 그 지세를 억누르고 정양리의 명당을 보호하였다.

그후 어느 늙은 도승이 정양리를 지나면서 "이 마을에 있는 『金鷄包卵形』의 명당을 찾아 집을 지으면 부자가 되어 자손 대대로 큰 부(富)를 누릴 수 있다. 그 대신 정양리 마을은 뱀과 자네가 들어와서 마을 전체는 폐허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곳 사람들은 누구나 부자가 되고픈 욕심은 있었지만 마을이 폐허가 된다는 불길한 예언에 그 누구도 명당터를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런데 일제(日帝) 식민지시대인 1936년 10월 1일 조선 총독부에서는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양리에다 화력발전소를 설치하였다.

이와 함께 큰 도로가 생기고 철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 후로 이 마을 사람들은 석탄분진과 소음 공해에 시달리게 되자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평화로운 이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늙은 도승의 예언대로 뱀은 신작로를, 지네는 철도를 뜻하며, 마을은 폐허가 되었지만 이 명당에 자리잡은 한국전력공사는 큰 복을 누리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풍수학자들은 일본 사람들이 조선의 맥을 끊기 위해 명당인 경복궁(景福宮)앞에 조선의 식민통치기관인 총독부 건물을 세워 주산인 북악(北岳)에서 종로, 남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맥을 끊어 버리려 했다고 한다. 또 경복궁 자리는 『작약꽃송이 형국』의 빼어난 명당이므로 작약꽃의 암술에 해당하는 근정전 앞에 있는 광화문과 홍례문을 헐어버리고 총독부를 지었다. 한편 일제(日帝)는 조선의 국운을 쇠퇴시키기 위하여 전국 명산의 혈에다 쇠를 박아 정기를 끊고, 명당에 보관되어 있던 역대 임금들의 태를 수거하고 명당중의 명당인 전국의 태식을 파괴하였다. 정조의 태실도 이때 일제 풍수 침략의 희생물이 되었다.

한일합방 이전에는 영월군수가 찾아와 제를 올리곤 했으나, 합방 후에는 철조망으로 막아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그후 1929년 이왕직(李王職)에서 태를 가져갔는데 백자항아리에다 영사와 함께 태를 넣은 은항아리를 하얀 가마에 태워 서울로 가져갔으며, 비석(碑石)과 상개연엽서(上蓋蓮葉石), 석난간(石欄干), 지대석(地台石), 팔각대(八角臺) 등의 석물(石物)은 석회광산업자에 의해 파손, 매몰되었으나 1967년 10월 27일 영월개발위원회(회장 朴福輝)에서 영월발전소(소장 汶洪秀)의 협조를 얻어 금강정(영월방송국)으로 옮겼다.

그러나 지금도 정양리 태봉의 땅 속에는 많은 양의 지대석과 팔각대 등이 매몰되어 있으며 지금도 간혹 이곳 주민들에 의해서 지대석이 발굴되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純祖 元年(1081)에 보면 『10월 9일 영월부에 있는 선대왕(정조)의 태실의 가봉을 이달 27일에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11월 11일에 하교하기를 『영월의 정조대왕 태실을 가봉(加封)하는 공력을 순조롭게 이루었으니, 나 소자(小子)의 애통한 사모가 더욱 깊어진다. 감동한 여러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그 노고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고자 하는 것이니 선동감 제조겸 서포관 정대용(鄭大容)에게는 정헌대부를 가자(加資)하고, 감역 겸 도차사원인 지방관 허질(許珞)에게는 가산 대부를 가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래골(秋洞)

정양리 동쪽인 계족산(鷄足山)으로 오르는 새재골 밑에 있다. 예전에 마을 어귀에 큰 추자나무(가래나무)가 있었으므로 '가래골'이라 하였다.


왕검성(王儉城)

영월읍 정양리에 있다. 일명 정양산성(正陽山城)이라 하는데,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축조된 마안봉지형의 포곡식 산성으로 자연석을 이용한 점판암 쌓기 방식을 이용하였다.

영월은 남한강 상류로 충북 단양과 함께 삼국 항쟁의 중심지였으므로 왕검성(王儉城)을 중심으로 태화산성(泰華山城), 대야산성(大野山城), 온달산성(溫達山城), 완택산성(完澤山城), 고성(古城) 등이 연결되어 있다. 특히 4∼5세기경 영월을 중심으로 삼국간의 항쟁과 영토 확장의 전투가 치열했으므로 이 시기에 축조된 성으로 추측하고 있다.

순조(純祖, 1800∼1834) 때 영월 부사 이효관(李孝寬)의 「해유서(解由書,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남긴 인수인계서)」에 『東面正陽山城, 周回布尺三千四百七十七尺, 高十九, 東邊三十尺, 北邊十八尺, 南邊二十八尺, 西面八十三尺---』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영월부읍지」의 기록에 의하면 『왕검성은 길이가 2314척이고 높이가 19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효관의 기록은 완택산성의 기록을 잘못 적은 것 같다. 왕검성은 둘레 771m, 성벽의 높이는 4∼10m, 폭 6m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나, 정문과 수구문이 있는 서쪽이 많이 붕괴되었다. 지금도 정양리에는 '성안'과 '담바우 샘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올챙이목

담바우샘골과 새재골로 갈라지는 도랑으로 지금도 봄이면 올챙이가 많으므로 '올챙이목'이라 한다.


공수앗(公須田)

정양리의 소수력 발전소로 가기 직전 급경사를 이루는 도로 남쪽에 있다. 정남향을 향하고 있는 넓은 펀디기밭으로 그 밑에는 범여울이 있으며 강 건너 팔괴리의 황새연못이 마주 보인다. 옛날 각 관아(官衙)의 경비와 중앙에서 오는 관리의 숙박과 접대에 드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방의 역(驛)에 지급했던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던 곳이다. 공수전은 고려 성종 2년(983)에 시작된 후 조선 세종 26년(1444) 전제개혁으로 줄어들고 『官屯田』으로 대신하였다. '앗'이란 '밭'의 고유어로 고려시대 평구도(平丘道)에 소속된 『정양역(正陽驛)』에 지급하는 공수전(公須田)이 이곳에 있었으므로 '공수앗'이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범여울

소수력 발전소 위쪽으로 공수앗에서 황새연못으로 건너가는 여울목이다. 옛날 계족산에서 태화산으로 가던 호랑이가 이곳 여울살에서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어 '범여울'이라 한다는 얘기가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얘기이다. 「영월부읍지(寧越府邑誌)」에 『虎灘在東南十里 石齒錨雜不船通 호탄은 영월부의 동남쪽 10리에 있으며 뾰족뾰족한 돌바위가 튀어 나와 배가 통과하기 힘든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에는 황새 연못쪽으로 물길이 나있었으며 그곳에는 호랑이 이빨같이 뾰족한 돌들이 많아 남한강의 뱃길을 넘나들던 뗏목들이 이곳을 통과하기 어려웠던 여울목이므로 '범여울'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독진이바위

소수력발전소와 거리원골 사이에 있다. 예전에는 강가의 벼랑 밑으로 오솔길이 있었는데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정도로 길이 험하고 좁았다. 옛날 옹기장수가 큰 독을 지고 이곳을 지나다가 독을 깨뜨렸으므로 '독진이 바위→독진이 베리'라 불렀다. 지금은 고씨굴과 태백시로 가는 595번 지방도로 밑에 있다.


원골(院洞)

영월 발전소를 지나 각시바위로 가기 직전인 원골식당 뒤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이다. 그 입구인 거리원골에는 안원골에서 시작되는 맑은 계곡물이 흘러내린다. 안원골은 깊은 산골인데도 큰 바위로 축담을 쌓은 후 작은 논다랭이에다 벼를 심은 천수담이 많다.

이곳은 단양, 영월, 하동 사람들이 연하, 정선으로 가는 지름길로 거리원골과 안원골을 지나면 연하리 태백기도원이 있는 남정골로 질러 갈 수 있다. 옛날에는 이 길을 이용하는 행인들의 편리를 봐주기 위해 세운 작은 행려원(行旅院)이 안원골에 있으므로 '원골'이라 하였다. 전에는 여러 가구가 살았으나 현재는 거리원골에만 4가구가 살고 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운영하는 영월 관내의 원으로는 교통의 중심지인 용정원(龍井院, 서면 쌍용리), 공순원(公順院, 주천면 신일리), 연평원(延平院, 북면 원동재 아래) 등 3곳이 있었다. 고려시대 서울(南京)에서 영월로 오는 역도(驛道_인 평구도(平丘道)에 속하는 정양리역(正陽里驛)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정양리라는 지명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그 외에도 영월에는 하원(下院), 소미원(小未院), 서원(瑞院), 복덕원(福德院), 제덕원(濟德院)등 작은 규모의 원집이 많았다.

출처 : 남한강 물길 따라 이어지는 발자취
글쓴이 : 산골어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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