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자취를 밟으며

눈 내린 태화산성에서

산골어부 2011. 1. 5. 11:42

2010년 12월 28일

눈이 하얗게 쌓였다.

아침에 일어나 승용차에 쌓인 눈을 쓸어내며 고민에 빠졌다.

오늘도 계속 눈이 내린다는데 태화산 태화산성을 가야하나.

모텔을 빠져나와 영월 터미널 옆에서 아침을 먹고

영월읍네를 한바퀴 돌아서 다시 모텔로 돌아왔다.

 

태화산은 1,027미터의 높은 산이고 태화산성은 동쪽 능선의 800고지에 위치한다. 

어제 답사한 왕검성과 달리 높은 곳에 위치하여 엄두가 나질 않았다.

문득 초등학교 5.6학년 시절에 동네 아이들과 오르던 국망산과 보련산이 떠올랐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에도 올랐는데, 저 산 쯤이야하는 오기가 생긴다.

 

태화산으로 향하는 길은 눈으로 하얗게 깔려있지만

얼어붙질 않아서 빙판처럼 미끄럽지는 않았다.

태화산 팔괴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태화산성을 향했다.

태화산의 옛 절터 입구에 초라한 비석이 하나 들어 왔다.

돌의 형상을 보니, 옛절터에 있던 표지석 같았다.

그러나, 비석에는 "태화산 태흥사"라는 글짜가

퇴색하여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태화산 태흥사는 작은 사찰로 추정된다.

하지만, 태흥사를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옛 영광을 그리워하며 그 흔적들을 남기고 있었다.

 

아무도 가지않은 눈쌓인 산길을 따라 태화산성을 향한다.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하며 이 산길을 가는 것일까 ?

드디어, 태화산성 서측의 토루가 시야에 들어온다.

태화산성은 토석으로 혼축된 산성이라서

무너져 내린 흔적들만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태화산성 서문지에서 남측으로 올라가니,

돌무더기와 석축의 흔적들이 보인다.

그러나, 온달산성이나 정양산성과 같은

거대한 석축과 돌무더기는 보이질 않는다.

석축의 흔적도 그리 정교하지도 견고하지 않았다.

태화산성 북측 치성터에 올라 영월 일대를 돌아보지만

흐린 날씨 때문에 강건너 정양산성도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날씨가 좋으면 영월읍내는 물론이고,

멀리 백두대간까지 보이는 곳이지만

눈과 안개 그리고 다시 또 눈이 내릴 것만 같은 날씨.

정말 어렵게 올라온 곳인데, 무척이나 아쉬웠다. 

 

태화산성 북측 북문지와  동측 성벽을 돌아보려니,

엄두가 나질않아 쳐다만 보고 서문지로 되돌아 왔다.

서문지에서 남측 치성터에 올라 고씨동굴 능선을 따라

하산하려니, 그 또한 엄두가 나질 않아 서문지로 돌아와 하산했다.

태화산성 둘레길을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

 

그러나, 태화산성을 돌아볼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긴다.

이 높은 산중에 누가 이 성을 쌓았을까 ?

고구려일까 ? 신라일까 ?

산 아래 온달산성은 온달장군의 유래로 가득하지만,

승장이 아니라 죽음으로 평강공주의 품으로 돌아갔다.

태화산 아래에 보이는 네개의 성.

완택산성.정양산성, 대야산성, 온달산성.

남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흔적들 ~~~~~

 

(태화산 등산 안내도)

 

(태화산성 안내 표지판)

 

(태화산 등산로 지도)

 

(태화산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영월화력 발전소 전경)

 

(남한강에서 바라본 정양산성)

 

(남한강에서 바라본 태화산성)

 

(고씨동굴에서 바라본 태화산성)

 

(태화산성 아래의 옛절터 입구 - 태흥사) 

 

 (옛 젙터 입구의 바위 - 불상을 모셨던 곳으로 추정된다.)

 

(태화산 옛절터 삼거리 이정표) 

 

 (태흥사 옛절터 석축과 돌탑)

 

(태흥사 옛 법당자리에 모신 부처님의 명칭을 표시한 비석들) 

 

 (옛절터 요사체의 석축) 

 

(옛절터 전경) 

 

(옛절터 전경) 

 

(태화산성 서문지 입구) 

 

(태화산성 서문지의 이정표) 

 

(태화산성 서문지의 주변의 성벽 흔적) 

 

 (태화산성 서문지의 주변의 성벽 흔적) 

 

(태화산성 서문지의 주변의 성벽 흔적)

 

 (태화산성 서문지의 주변의 성벽 흔적)

 

 (태화산성 서문지의 주변의 성벽 흔적)

 

 (태화산성 북서측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북서측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북서측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북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남한강과 정양산성)

 

 (태화산성 북측 치성터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북측 치성터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북측 치성터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북측 치성터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북측 치성터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북측 치성터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북측 치성터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북측 치성터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서문지 남측 성벽 흔적) 

 

(태화산성 남서측 치성터의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남서측 치성터의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남서측 치성터의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남서측 치성터의 성벽과 돌무더기) 

 

(태화산성 남측 성벽 흔적) 

 

 (태화산성 남서측 치성터에서 태화산 등산로 안부의 토성 흔적)

 

 (태화산성 남서측 치성터에서 태화산 등산로 안부의 토성 흔적)

 

 (태화산성 남서측 치성터에서 태화산 등산로 안부의 토성 흔적)

 

 (태화산성 남서측 치성터에서 태화산 등산로 안부의 토성 흔적)

 

 (태화산성 등산로에 서있는 옛전신주)

(참고자료) - 영월 태화산 태화산성(강원도민일보에서)

 

 
▲ 남한간 상류 성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태화산성은 백제·고구려·신라로 주인이 뒤바뀐 치열했던 역사현장이다.
하늘이 맑은 날, 영월군과 단양군의 경계 태화산(해발 1027m)을 찾았다.

남한강 상류는 산자락을 휘감아 흐르고 4억년의 신비를 간직한 고씨동굴(천연기념물 제76호)를 품에 안고, 사계절 변화무쌍한 부드러운 능선 길은 아름다운 비경을 보여주는 약 다섯 시간의 가족 산행지 최적의 코스로 잘 알려진 산림청 지정 한국의 100대 명산의 한 곳이다.

봉정사 뒤쪽 길에는 밤나무가 가시송이를 벌려 알밤을 떨고, 쑥부쟁이 보라색과 미국쑥부쟁이 자잘한 흰 송이가 어우러진 입구는 초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겨 마음부터 풍성하다.

태화산성은 신갈나무 숲으로 이어진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해발고도 약 900m 봉우리에 길이 · 넓이 약 400m 둘레 약 1,200m의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 성 내부에 골짜기를 포용하고 있는 형태로 능선을 따라 축조한 산성)이다.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신갈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큰 돌 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 여장(女墻 :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과 망을 보는 망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영월의 다른 산성 대야산성, 정양산성 영춘산성 등과 같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다른 산성들이 돌로 된 석성으로 실전에 사용된 반면 남한강 상류의 성 중 가장 높은데 위치한 태화산성은 적성을 감시하고 그 상황을 우군에게 전하는 사령탑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태화산 망루에서의 신호로 적의 동태가 즉시 망루를 통해 전해지면 대야산성 왕검성에서는 아름답고 비옥한 남한강의 옥토를 두고, 백제와 고구려, 신라로 주인이 뒤바뀌는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리라. 성벽을 따라 약 300m 정도의 평지는 옛 건물지와 내환도로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소나무와 신갈나무 숲으로 온전한 형태를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당시의 우물터는 아직도 남아 목 마른이의 목을 축이며 잠시 전장에서 쉬던 그 옛날 삼국시대인의 정황과 애환을 생각해 보게 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계족산과 읍내 풍경은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의 조화 속에 그 옛날 이곳이 삼국에게 군사적 요충지로 뺏고 빼앗기는 일을 되풀이했다는 이야기가 바람소리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김선옥·영월국유림관리소 숲해설가

 

참고자료 - 영월읍 팔괴리 지명유래

 

팔괴리 지도 이미지입니다.

연수앗(宴需田)

영월화력발전소 건너편에 있는 아홉 고개의(구개, 九犬)남쪽이다. 수만 편의 넓은 땅으로 여러 집안들의 위토(位土)가 있다. 이 위토를 경작하고 가을에 벌초와 제향(祭享)을 올렸으므로 '연수앗(宴需田)'이라고 한다. '앗'은 '밭'의 고유어이다. 전에는 영월화력발전소의 분진으로 농사짓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분진 제거장치가 설치되어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괴안리(槐安里)

발전소 앞에 있는 잠수교를 지나 흥월리로 가는 길목 마을이다. 원래의 이름은 묘족리(描足里)라 하는데, 강 건너 마을인 정양리의 지형이 계족산의 맥이 뭉쳐서 황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의 명당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이 마을은 고양이가 닭을 해치려는 형상이므로 지명을 묘족리(描足里)라 하였으나 마을 이름을 '괴안리(槐安里, 큰 느티나무가 있는 편안한 마을)'로 고치고 연수앗에서 팔계(八溪)로 넘어 가는 아홉 굽이의 고개도 구개(九犬)라 하여 정양리의 명당을 보호하였다고 한다.


안말(內洞)

연수앗과 장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안말 입구인 신작로 밑에는 수량이 풍부한 샘이 솟고 있다. '거릿말'과 대칭 되는 지명으로 마을 안자락에 있으므로 '안쪽에 있는 마을' 즉 '안말'이라 하였다.


언덕말개

괴리에서 흥월리로 넘어가는 굽이가 긴 언덕 위에 있다. 팔괴초등학교가 있으며 그 밑에는 지금도 물래방아터 돌확이 남아 있다. 즉,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므로 '언덕말개'라 한다.


건너들

언덕말개의 냇물 건너편에 있다. 태화산 산자락이 뻗어 내린 고세 형성된 마을로 수천 평의 밭이 한 버덩을 이루고 있다. 앞에는 남한강의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며 강 건너에는 발전소와 정양리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자연 경관이 빼어난 마을로 지금은 두 가구가 살고 있다.


태화사절터(太華寺址)

괴리에서 태화산으로 올라가는 8부능선 골짜기에 있다. 태화사터 샘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반석 사이로 흐르는데 울창한 숲과 나무 때문에 음지 식물이 많이 자란다. 길이 험하고 너럭바위와 자갈이 많은 '재작밭굼'을 지나면 옛날 봉정사 터가 나온다. 지금도 봄, 가을로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등산코스로도 유명하며, 팔괴초등학교가 사용하는 상수원 아래에는 6.25사변 때 마을 사람들이 숨어살았던 피난굴이라는 동굴도 있다.


태화산성(太華山城)

괴안리(槐安里) 뒤쪽인 태화산에 있는데 돌과 흙으로 축조된 혼합 축성법으로 쌓은 성이다. 옛날 어느 집안에 남매 장수가 있었다. 그 어머니는 성(城)쌓는 내기를 시켜서 이기는 자식을 키우기로 하였다. 아들인 왕검에게는 정양리의 돌성을 쌓게 하고 딸은 태화산의 흙성을 쌓게 했는데 어머니가 보니 딸이 아들보다 먼저 완성할 것 같으므로 흙성을 무너뜨리자 딸은 흙더미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래서 왕검성은 지금도 완벽한 상태로 남아있으나 태화산성은 무너졌다는 전설이 이 지방에 전해 온다.


문바위, 잘바위

태화산으로 오르는 길목 서쪽 치랠골에 있다 이곳에는 문짝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고 그 뒤에는 둥글고 넓은 너럭바위가 있다. 앞에 있는 것이 '문바위'이고 그 안자락에 있는 바위는 대여섯 사람이 비를 피할 수 있는 방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잘바우'라 한다. 지금도 여름 한철이면 산을 믿는 사람들이 이곳에 거처한다.


참샘물게

괴리 송어양식장을 지나 태화산 줄기와 강물이 접하는 곳으로 염소를 키우는 작은 목장이 있다. 이곳에서 나는 물은 수질이 좋고 13°C 나 될 정도로 수온이 차다. 사시사철 수량이 일정해서 '참샘물께'라고 하는데 이 물을 이용하여 송어를 부화한다. 장마 후 여름 한철 솟아나는 샘은 '개샘'이라고 한다.


황새연못

참샘물께 앞에 있는 넓은 버덩이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이 되면 이곳으로 물이 넘쳐 흘렀는데 예전에는 황새, 두루미 등 철새들이 먹이를 잡기위해 많이 모여들었으므로 '황새연못'이라고 하였다. 그 하구 쪽에는 호랑이 이빨처럼 뾰족한 돌들이 튀어나온 '범여울'이 있어서 뗏군들이 이곳에서 많이 죽기도 하였다. 수석산지(壽石産地)로도 유명하여 전국의 수석인들이 탐석을 위해 많이 찾는 곳으로 특히 산수경석(山水景石)이 많이 난다. 황새연못 강 건너편은 공수앗과 소수력발전소가 있다.


팔계(八溪)

괴리(槐安里) 서북쪽 마을로 덕포 비행장에서 찻배를 건너야 갈 수 있다. 큰팔계와 작은팔계가 있으며,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의 묘가 있다. 여덟 개의 골짜기로 이루어진 마을이므로 '팔계'라고 하였다. 엄충신의 묘를 중심으로 남쪽 마을은 '큰 팔계' 북쪽 각고개로 넘는 마을은 '작은 팔계'라 한다.


더울고개

큰팔계에서 흥월리의 다릿말(달이말)로 넘어가는 큰 고개이다. 산등성이가 높고 경사가 심하여 한겨울에도 이 고개를 넘자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는데, 고개 정상에 큰 소나무가 있어서 사람들이 이곳에서 더위를 식히고 갔으므로 '더울고개'라고 하였다. 정양리 잠수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흥월리 사람들이 이 고개를 많이 이용하였다.


각고개(角峙)

하송리 영월공전 건너편 각고개 마을에 있는 고개이다. 지금은 교량 건설이 거의 되어가고 있는데 전에는 각고개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다녔다. 마을 뒤에는 작은팔계로 넘어가는 고개가 소뿔처럼 생긴 큰 봉우리 사이로 나 있으므로 '각고개'라 부르게 되고, 동네도 '각고개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