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자취를 밟으며

눈내리는 대야리 산성을 바라만 보며

산골어부 2011. 1. 5. 09:06

연말에 이 글을 쓰다가 정리를 못해

2011년 신묘년 새해에 나머지를 정리한다.

 

본래 일정은 남한강을 따라 정선에서 충주까지의 산성들을 돌아볼 예정이었으나

28일 아침에  내린 눈과 태화산성 답사 후 갑짜기 쏟아지는 눈으로 인하여

영월읍 김삿갓면 가재골의 대야리 산성을 보지 못하고, 나머지 일정을 

다음으로 기약하며 돌아서야 했다.

 

온달산성과 적성산성과 망월산성 등은 가본 곳들이고,

또한 성의 규모도 작고 성곽의 특징들이 잘알려져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대야리 산성을  바라만 보다가 돌아서는 마음은

눈 내리는 대야리 가재골처럼 2010년 한 해를 베일 속에 남기는 것 같았다. 

~~~~~

 

이번 답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태화산성과 대야리 산성이었다.

그 동안 돌아본 산성들이 계립령과 조령관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면,

이번에 답사하는 산성들은 소백산과 선달산을 경계로한

죽령. 마구령.고치령.선달령.우구치와 연관된 산성들이다.

남한강변의 산성들은 그 유역에 따라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

 

이 글에서는 그 산성들을 열거만 해본다.

 

태화산성을 중심으로 마주하는 정양산성과 대야리 산성과 온달산성.

남한강 동강변에 자리한 고성산성과 완택산성. 공기산성(북면).

남한강 주천강변에 자리한 도원산성(수주)과 법흥산성(수주),영원산성(원주),

남한강 황강변에 자리한 적성산성과 망월산성과 와룡산성. 금봉산성(남산성)

남한강 달천유역에 자리한 대림산성.장미산성. 보련산성. 무쇠봉성터.탄금대토성.

남한강 여강유역에 자리한 망이산성,죽주산성.설성산성.설봉산성.효양산성.파사성.함왕산성

 

이번 답사를 하기 전에 대야산성에 대한 위치를

정확히 검색하지 못하여 일어난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정양산성(왕검성) 답사를 마치고,

대야산성 위치나 확인하려고 지역주민들에게 물어도 잘 모른단다.

그래서 온달산성이 있는 온달관광지 관리사무소에 들렸다.

온달관광지 관리실 직원에게 대야리 산성을 물으니,

단양에서 수십 년을 살았지만 그런 산성은 모른단다.

그리고는 남들도 다 아는 단양지역 산성들만 열심히 열거한다.

그래서 관리사무실 컴퓨터로 인터넷 검색을 하여

영춘면과 김삿갓면의 경계지점인 가재골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다.

 

관리 사무소에서 불과 몇KM도 안 떨어진 곳에 유적지를 모르면서

무슨 관광안내와 문화유산을 해설한다는 것인지 답답할 따름이다.

그리고, 영월군청으로 전화로 대야산성 정보를 문의하였더니,

담당자가 없어서 모르니, 이리저리로 전화만 연결하여 주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

 

태화산성과 정양산성과 대야산성과 온달산성은

군경계선만 다를 뿐 불과 10KM 이내의 산성들이다.

온달산성 아래의 온달동굴과 온달관광지에서

온달에 대한 전설만 알고 주변 산성을 모른다면

온달장군이 이곳에서 왜 전투를 하고

어떻게 전투를 하다가 사망을 했는지 ~~~~

 

온달관광지가 활성화 된 것은 온달성과 온달동굴 때문이 아니라,

역사 드라마 세트장 덕분이라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온달장군과 관련된 역사테마 관광보다는 세트장 관람이 우선이다.

그러나, 관광지를 안내하고 설명하시는 분들이

온달장군에 따른 역사적 사실과 설화를 이야기하면서

~~~~~~~~

그에 대한 이야기는 ~~~~~~

 

답답한 마음을 뒤로 하고 대야산성에 대한 자료만 정리해본다.

 

(고씨동굴에서 바라본 대야리 산성)

 

(각동에서 바라본 대야리 산성 가는길)

 

(각동에서 바라본 대야리 가재골 산성 전경)

 

(각동에서 바라본 대야리 산성)

 

참고자료 - 영월 대야산성 (大野山城)( http://blog.daum.net/bae6607/7847530)

 

참고자료 - 대야성(영월군청)

일반정보

  • 소재지 : 김삿갓면 대야리 산87임 일대
  • 문의처 : 문화관광과 : 033) 370-2531
콘텐츠 메인 사진 입니다.

상세정보

대야리 가재골 마을의 구구새민박집에서 북동쪽의 산길을 따라 약 30여분 올라가면 해발 400.8m의 큰재(성재) 정상에 자리한다. 이 산성은 남서쪽의 온달산성, 북서쪽의 정양산성(왕검성)의 중간에 위치한다.

대야산성(大野山城)은 테뫼식산성으로 평면형태는 부정타원형이다. 둘레는 약 400여 m 정도이며전체를 석축으로 돌렸으나 현재는 붕괴되어 남쪽성벽 일부와 서쪽성벽 일부만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7~8m 너비의 내환도가 성벽을 따라 전체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4.5~5m 정도로 내외 협축으로 잔존성벽은 폭 3.3~3.4m로 내탁된 모습도 보인다.
성체는 석회암이나 점판암재질로 판상석으로 수평눈줄은 맞추고 있다. 성내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강돌이 성벽을 따라 곳곳에 흩어져 있다. 출토유물은 회백색연질의 기와편과 적갈색연질과 회청색 경질의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영월군·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00, 《영월 왕검성》.

 

참고자료 - 영월군 김삿갓면 대야리 지명유래

 

 


  김삿갓면 대야리(大野里)

대야리(大野里)
맛밭 건너편에 있으며 들녘에 크고 넓은 논, 밭이 있으므로 토속적인 땅이름으로 '댓들'이라고 했으나 한자식 지명인 '대야리(大野里)'로 변하였다. 대야는 마대산 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로 1개리 86가구에 315명이 생활하고 있는데 자연 부락은 맛밭, 가재골, 덕내, 마대 등이 있다. 조선 순조 때 실학자인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맑은 물이 흐르고 넓은 들녘으로 형성된 대야리를 살기좋은 『가거처(可居處)』로 기록할 정도로 인심이 좋은 마을로 논농사와 콩, 옥수수, 들깨 등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 맛밭(麻田)
각동으로 건너는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강원과 충북의 접경 지역으로 60∼70년전만 해도 상선이 어물, 소금 등의 생활 필수품과 곡식을 물물 교환하던 곳이다. 이곳 지명의 유래는 충북 영춘면(永春面)과 경계를 이루는 마대산(馬代山, 1,052.2m)이 뒤에 있고, 역(驛)에 지급하던 '마전(馬田)'이 있었으므로 '마전(馬田)→맛밭(麻田)'으로 변하였다. 고려시대 이웃 마을인 정양리에는 평구도(平丘道) 소속의 '정양역(正陽驛)'이 있었다.

▣ 가재골(可在洞)
맛밭 남쪽으로, 조선 후기 사회가 혼란해지자 정감록에 심취한 평안도에 살던 박씨(朴氏)들이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이 사람들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지금도 그 지명을 '텃골'이라고 부르며, 한때는 40여 가구가 넘었으나 지금은 6가구가 살고 있다.
이곳의 지명 유래는 길흉이나 화복을 예언한 비기서(秘記書)에 심취한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면서 풍수학적으로 '가히 살아남을 만한 곳이다.'는 의미에서 '가재동(可在洞)'이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본동과 떨어진 '가장자리 마을'이므로 '가재골'이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 텃골
가재동의 개척자로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온 평안도 박씨(朴氏)들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이다.

▣ 민골
가재골의 남쪽 맛대로 넘어가는 목너미재 밑에 있다. 주위의 산세에 비하여 평평한 지대이므로 '민골'이라고 하는데, 이곳을 지나면 영춘면 푸새골로 간다.

▣ 목너미재
가재골에서 마대(馬垈)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마대산 줄기를 넘는 고개이므로 생겨난 이름이다.

▣ 대야산성(大野山城)
대야리의 본동과 가재골로 넘어가는 큰 재 정상에 있다. 삼국 시대 남한강 뱃길을 지키기 위한 성으로 온달성과 왕검성 사이에 축조되었다.

▣ 영전이재(嶺轉峙)
가재골과 충북 영춘의 푸새골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큰 고개(嶺)를 넘어(轉)간다고 하여 '영전이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 큰재
가재동 텃골에서 대야(大野)로 넘어가는 큰 고개이다. 그 북쪽에는 대야리로 가는 작은 고개가 있다.

▣ 구멍바위
맛밭에서 대야리로 가는 998번 지방도 좌측 벼랑으로 여자의 음부(陰部)와 같은 큰 구멍이 뚫려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구멍바위' 또는 '바람바위'라고 하는데 동네 총각들이 막대기를 가지고 그 구멍을 찌르고 장난을 치면 대야리 본동 마을처녀들이 바람이 났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어른들이 1970년대에 시멘트로 구멍바위를 막아버렸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대야본동(大野本洞)
맛밭 대야교 우측인 사태밭 서낭당이 있는 마을이다. 대야리의 중심 마을로 '대야, 본말, 댓들'이라 하는데 이는 마을 앞에 큰 들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칠금이재
대야본동에서 옥동의 칠금이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이 골짜기를 '칠금이골'이라 부른다.

▣ 사태밭 조산당
대야본동 입구에 있는 서낭당이다. 병자년(1936) 홍수 때 마대계곡의 산사태로 큰 흙더미가 떠내려와서 쌓였다. 마을 사람들은 건너편의 구멍바위의 음기(陰氣) 때문에 본동의 양기(陽氣)가 위축되는 것을 걱정하여 이 흙덩이로 조산(造山)을 만들고 서낭당을 세워 음기를 눌렀다.

그후부터 이곳을 '사태밭 조산당'이라 불렀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주과포를 준비하여 매년 당고사를 올리고 있는데 제주는 생기복덕을 맞추어 동네 사람들 중에서 선출한다.

▣ 사태밭소
대야리의 당목(堂木) 숲이 우거진 사태밭 조산당 앞에 있는 깊은 소이다. 1972년의 홍수로 인하여 원래의 모양은 없어졌다.

▣ 새터(新基洞)
대야분교가 있는 마을로 사람들이 새로이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불리어진 이름이다.

▣ 모퉁이
각동초등학교 대야분교를 지나 덕내(큰내)로 가는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바람이 세게 부는 곳으로 정월 대보름에 연날리기 시합을 했으며, 주위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좋아여름 한철 모퉁이 마을인 각동 2교 밑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다. 이곳은 연을 날리며 홍취를 돋우던 곳 이라 하여 '연흥(鳶興)'이라고도 한다.

▣ 덕내(德川)
모퉁이 맞은편으로는 논물을 대기 위하여 보(洑)를 막은 덕내보와 큰 느티나무가 있는 동네이다. 이 마을은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옥동리와 경계가 되는데 마을 앞으로 큰 옥동천이 흐르므로 '덕내'라고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덕내(德川)'로 변했다. '덕'은 '크다'는 뜻이다.

▣ 칠성백이
덕내 북쪽 수리봉 밑에 있다. 절벽이 무너져 움푹 파인 곳으로 칠원성군(七元星君)에게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므로 '칠성백이'라고 부른다.

▣ 성황목(城皇木)
덕내 입구에 있는 신목(神木)으로 수백년 지난 느티나무가 있다. 예전에는 당(堂)이 있었으나 홍수로 없어지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돌 축을 쌓은 후 당목(堂木)을 숭배하고 있다.

▣ 대야굴
대야리 덕내 북쪽의 수리봉 병창 밑에 있는 길이 400m의 석회 동굴로 강원도 기념물 32호로 지정되었다. 폭 5m, 높이가 10m인 이 굴은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이 있으며 27종의 생물이 살고 있으나 관리부족으로 많은 종유석들이 훼손되었다.

▣ 수리봉
덕내 북쪽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수리'란 '높은 곳'을 뜻하는데 사람의 머리 윗부분도 정수리라고 한다. 즉 우리말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수리메' 또는 '수리봉'이라고 불렀다. 수리봉은 다시 매봉산, 응봉산, 매화봉 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

▣ 골안혈터
덕내 북쪽 서림산에 있는 혈터로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장수인 이여송(李如松)이 혈을 지른 명당이 있는데 이때 지른 혈이 남아 있다고 한다.

▣ 골안(谷內)
덕내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예전에는 이곳을 지나 마루재를 넘어 진별리(津別里)의 마리골로 다녔다.

▣ 마대(馬垈)
대야(大野)의 남동쪽 마대산(馬垈山) 골짜기에 있어서 그 지명을 '마대→맛대'라고 한다. 예전에는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마대 한의원 엄상일(嚴相一)의 손자인 엄기석 씨의 농막만 있다.

▣ 상암(象岩)
맛대(馬岱)의 유명한 의원이었던 엄상일(嚴相一)의 집 앞에 있는 큰 바위이다. 엄의원은 젊어서부터 산공부를 하여 의술을 터득한 후 가난한 환자들을 많이 고친 분으로 그의 처방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나무 열매나 풀 뿌리 등으로 조제한 약이지만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맛대는 산이 험하여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서 가축을 물어갔다. 엄 의원이 집 앞에 있는 바위에 가로 15cm, 세로 20cm 크기의 『상암(象岩), 乙酉年 五月(1909년)』이라는 글을 새기자 그 후부터는 가축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상암(코끼리 바위)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하동면 대야리 맛대 마을에 남아 있다.

▣ 자작목이
마대 북쪽 골짜기에 있는 고개이다. 자작목이는 곡우(穀雨)때 나무에 흠을 내어 수액을 받아먹는 고로쇠나무와 자작나무가 많았으므로 '자작목이'라고 불렀다. 이 고개를 넘으면 하동면 옥동리 칠금이로 간다. 24절기의 하나인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인 곡우때 받아먹는 고로쇠나무의 수액은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

▣ 방골
자작목재 동북쪽으로 난 밋밋한 골짜기로 와석송어장이 있는 두릉골로 가는 길이 있었다.

▣ 방울재
마대에서 충북 영춘면(永春面) 동대리(東大里)의 베틀 마을과 점터로 가는 고개이다. 예전에 충청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말이나 노새 등에 짐을 싣고 이 고개를 많이 넘어 다녔는데 그 때 목에 매달았던 방울이 울렸으므로 '방울재'라 하였다. 일설에는 방울처럼 동그란 산봉우리로 난 고개길이라는 얘기도 있다.

▣ 큰방골
마대의 방골 남쪽에 있다. 방골보다 큰 골짜기라서 '큰 방골'이라고 한다.

▣ 타련골
영춘과의 경계인 마대산(馬垈山) 줄기가 뻗어 내린 골짜기이므로 '타련골'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6.25사변 때 마대에 사는 엄씨들이 피난을 했던 동굴이 있는데, 이 넓은 석굴안에는 먹을 수 있는 물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