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금북정맥이 지나는 음성군의 금왕과 삼성은 남한강의 청미천과 금강의 미호천이 분기하는 지형으로
각 수계에 따라 지리적 특성이 혼재하는 특수지역으로 경기도와 충청도와 경상도가 충돌하는 완충지역처럼
보여진다.
지역편제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지방자치단체인 증평군은 인접 지역인 달천유역의 괴산과 미호천 유역의 증평이
수계와 지형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같은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지역 주민간의 충돌을 일으키다가 최근에 분리된
지방자치단체가 되었다. 증평군은 미호천 유역이면서 청주와 진천에 속하지 못하고 괴산군에 속해 있다가 별도로
분리 되었지만, 아직도 국회의원 선거구에서는 진천, 음성, 증평, 괴산이 한 선거구가 되어 선거 때마다 지역주민이
갈등하고, 같은 수계인 청안과 사리는 함께 분리되지 못하고 괴산에 속해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음성 외서촌이라고
불리우는 금왕괴 심성 지역도 수계와 지역 경계선이 불분명하여 주로 충청도의 충주목에 소속되어 있던 곳이다,
그리고, 음성군도 지역세가 음성과 금왕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최근에는 진천.음성 혁신도시인 중부 신도시가
접경지역에 조성됨에 따라 음성과 진천의 통합론이 제기되는 곳이다, 이는 현재의 행정편제가 조선시대의 군현들을
잘못 통합하여 초래된 결과로 개선되어야 할 제도이지만 지역 이기주의가 강하여 쉽지않은 일이다.
이번에 한남금북정맥 중 맹동의 소속리산에서 삼성의 망이산에 이르는 지역을 돌아보며 가장 조망이 좋은 망이산
망이산성과 외서촌의 중심에 있는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 토성(장자봉 산성), 관성리의 우등산 토성과 팔성산 토성을
답사한 자료를 중심으로 충주목의 특별지역인 외서촌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충주목 외서촌에 대하여
"이 지역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지역이며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 신라의 삼국이 서로 뺏고 뺏기는 접경지대였다는 사실은 망이산 이라는 지명에서도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이 지역 주변에 연탄처, 대조곡처, 상맥곡처,하맥곡처 등의 처라는 특수부락이 설치되어 있던 천민족 또는 소외지역 이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충주목의 속면으로 이 지역을 포함한 금목면, 맹동면, 소탄면, 법왕면, 천기면, 기내면, 두의곡면, 대조곡면, 사다산면 생동면, 무극면, 감미곡면, 거곡면등 13개면 210개 동리를 일괄하여 외서촌이라 불렀다. 위 13개 면지역은 구릉지대로 광활하고 평평한 야산이며 골짜기로 야수를 잘 이용하여 수답을 경작하나 한발이 심하면 건답이 되는 곳이다. 선조 32년(1602)충주목사 정구(호:한강, 관:증 영의정)는 이곳을 돌아보고 “가가곡이나 왕화부도지처”라고 기술하였다. 중앙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특별난 벽지라는 뜻이다."(삼성면 유래에서)
충주목 외서촌은 현재의 금왕읍, 삼성면, 대소면, 맹동면, 감곡면, 생극면 일대를 가리키지만, 넓게 보면은진천군의 진천읍,덕산,이월,초평,백곡,광혜원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남으로는 두타산, 북으로는 망이산, 동으로는 수레의산, 서로는 금북정맥(칠장산)과 만뢰지맥(만뢰산)으로 둘러쌓인 미호천과 청미천의 상류지역이다.
충청도 충주목에서 가까운 거리의 속현과 달리 금왕. 삼성, 생극, 맹동, 대소, 삼성 등의 광활한 지역인 외서촌이
음죽현, 음성현, 진천현 등처럼 분리되지 못하고, 충주목에서 먼거리인데도 충청도 관찰사인 충주목사가 직접관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충주목에도 특수지역이 산재하여 있는데, 대부분이 철기소나 자기소에 속한 곳들이 많으며
고려의 대몽항쟁으로 유명한 김윤후 장군의 충주전투에서 등장하는 다인철소가 그 대표적인 지역이다.
향,소,부곡과 같은 천민집단지역은 본래 하층민들이 분리되어 거주하며 국가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전쟁포로와 특정지역의 주민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영토를 확장하거나 정착시키는
노역을 담당하게도 헸었다. 국원성과 중원경이 있던 충주지역도 신라가 남한강 유역을 지배하면서 가야의 유민들을
이주시켰으며, 신라의 왕족과 가야유민인 우륵 등이 충주로 이주하였고, 진천과 음성 지역은 가야의 왕족과 장수들이
이주한 기록들이 전해지는데, 가야 출신인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은 차령산맥(한남금북정맥)을 따라 변방을
지키거나 산성을 구축하며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고, 당나라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는 역할을 담당했었다.
특히, 한남금북정맥에서 소속리산(음성 꽃동네 뒷산)에서 망이산성이 있는 망이산(마이산) 구간은 금강의 미호천과
남한강의 청미천이 분기하는 지역이지만, 낮은 구릉지로 수계가 형성되어 그 경계가 불분명하여 외부세력에 저항하는
큰 성이 없고, 병암리 토성을 중심으로 우등산 토성과 팔성산 토성 등이 망루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원삼국 시대에 마한과 백제가 지배하고 있던 곳으로 국가 간의 국경분쟁보다는 지역토착 세력에 의한
토착민 보호를 위한 토성들이 구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음성지역의 외서촌은 천민지역이라기 보다는
변방을 지키기 위해 관리되던 지역으로 외서촌의 거주민들이 인접한 지역의 설성산성,죽주산성,망이산성,수정산성,
서운산성 등을 구축한 것은 아닌가 한다. 특히 병암리 토성은 평지성이 아닌 야산에 축성되고, 축성시기가 알려진
것보다 더 오래 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잔존하는 성터도 원형이 크게 훼손되질 않아서 산허리를 따라 이어지는
토축을 쉽게 구분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외서촌 지역인 금왕.대소,삼성 등은 무수히 많은 공장과 기업체들이 입주해 있지만, 경인지역에서 이주한중소공장과 소규모 공업단지가 난립하여, 그 옛날의 외서촌과 닮은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 후면 우등산
아래에 있는 외서촌 선산으로 시제를 다시 다녀올 예정이다. 어릴 적에 집안 어른들이 외서촌으로 시제와 종친회
때문에 금왕과 노은을 걸어다니시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가는데, 하루ㅜㅜㅜㅜㅜㅜ
시제 지내는데, 하루ㅜㅜㅜㅜㅜ
오는데, 하루ㅜㅜㅜㅜㅜㅜㅜ
그리고, 2박3일의 긴 여정과 술독을 푸는데, 또 하루~~~~~
병암리 토성터 남측의 등산로
병암리 토성터 남측의 묘지
병암리 토성터 남측의 묘지
병암리 토성터 남측의 묘지
병암리 토성의 토축
병암리 토성의 토축
병암리 토성 서측치에서 바라본 팔성산
병암리 토성 서측치
병암리 토성 서측치에서 바라본 음성 삼성면 망이산[望夷山]
병암리 토성 북측치
음성 생극면 팔성성과 임오산
병암리 토성에서 바라본 보현산과 소속리산
음성 금왕읍 구걔리 우등산과 안동 권씨묘 전경
음성 원남면 사향산성 [陰城 謝香山城] 전경
장자봉 산성
- [개설]
장자봉 산성은 문헌 기록이나 조사 자료는 전혀 없고 2002년의 지표 조사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 산성이다.
- [위치]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병암리와 만담리 뒤 해발 192m의 장자봉 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장자봉 산성의 동쪽으로는 북류하는 응천(鷹川)을 끼고 음성-장호원 간의 국도 37호선이 지나고 있고 북쪽으로는 삼성면 방면의 도로가 지나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며, 북동쪽 1.5㎞ 지점에는 이진봉 산성이 있고 서북쪽 3㎞ 지점에는 팔성산성이 마주보이고 있다.
지리적으로 주변의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는 중앙에 위치한 점에서 생극면 소재지 일대에서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서 음성-장호원-여주-이천 방면의 통로를 지키기 위해 쌓은 산성으로 생각된다.
- [형태]
장자봉 산성은 남서-북동 방면으로 뻗은 산 능선 위에 축조된 토축 산성으로 동서 총길이가 500m, 전체의 둘레는 1㎞가 넘는 대형 산성에 속한다. 남서쪽이 가장 높은 봉우리는 봉분 형태로 되어 있고 바로 동측에 역시 높이 1.5m, 둘레 약 20m의 대지가 있으며 사이에 한 아름이 넘는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정상의 고대(高臺)는 동측 높이 약 8m, 둘레 약 15m이며 서남쪽 봉우리에서 동북쪽으로 안부를 지나 동북쪽 봉우리로 가는 능선을 따라 삭토 또는 성토를 함으로써 토루를 만들었다. 서남쪽 봉우리 역시 같은 방식으로 축성하여 두 봉우리가 각기 토루를 두르고 안부로 연계되었다.
- [현황]
전체 길이가 1㎞가 넘는 대형의 산성에 속하는 장자봉 산성은 동서의 경사가 매우 급한 천연의 요새로 동쪽 응천 너머로 바로 이진봉이 있고 서쪽으로 우등산이 마주 보인다. 토루와 성 안에는 낙엽이 무성하게 쌓여 있어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정상부 서쪽으로 형성된 평탄 대지는 장수황씨의 집단 묘역으로 10여 기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묘지 주변에 고려시대의 기와편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통일신라 말기 내지 고려시대의 호족에 의하여 축조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참고문헌] |
• 『문화유적분포지도』 -음성군-(음성군·청주대학교 박물관,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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