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산성과 고산사가 있는 와룡산의 옛이름은 무엇일까 ?
등산지도에는 와룡산성에서 제일 높은 곳이 북봉이고,
남측 봉우리에 월형산으로 표기되어
고산사 응진전 뒤 봉우리를
와룡산으로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고산사가 있는 와룡산성은 남동사면 암릉을 따라 산성이 축조되어 있고,
덕산 신현리 용바위에서 월악으로 흐르는 용하계곡을 굽어 보고 있다.
또한 와룡산성을 월형산성 또는 북형산성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는 월악산의 옛 명칭인 월형산과 월악산의 북측에 있기에 북형산으로 해석하지만,
와룡산을 북형산으로 표기한 기록은 찾을 수 없고, 현재 지도에서만 월형산으로 표기된다.
충주목 청풍현 고지도에서는 와룡산 지역이 금곡산(金谷山)으로 표기데는데,
이는 월악산 송계에서 한수면의 덕곡으로 넘어가는 쇠시리재에서도 나타난다.
북형산성은 신라의 경주에서 월성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명활성, 서쪽에는 서형산성,
남쪽에는 남산성, 북쪽에는 북형산성이 있는데,
북형산성이란 명칭은 여기에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월형산은 삼국사기 잡지 제사편에서 나타나기에
삼국시대 부터 이어온 지명이다.
월악산의 옛 이름을 월형산으로 소개하는 글에서는
월형산의 기록을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에서 찾고 있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세종지리지의 청풍군편에 나타난다.
또한 대몽항전을 기록한 고려사에서
1256년 고려군이 몽고군에 패하여 월악산으로 퇴각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나타나는 월악신사의 위치비정에 따라
덕주산성과 와룡산성에 대한 연혁도 변할 수 있으며,
신라 때 축성한 사열산성도 청풍의 망월산성이 아니라,
충주의 남산성이나 월악산의 덕주산성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고구려의 사열이현인 월악산에서 제를 올렸다는 기록에서
고구려의 사열이현이 한수면과 살미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중원경이 현재의 충주로 이동함에 따라 사열이현의 중심도
청풍으로 옮겨간 것으로 볼 수있기 때문이다.
이는 와룡산성과 덕주산성에 대한 고찰에서
고구려의 사열이현과 신라의 사열산성에 대한 문제는
노음죽현과 사열이현의 가운데 위치하는 국원성의 위치와 영역에 대한 논란으로
현재의 충주와 청풍이 아닌 삼국초기의 시점에서 보아야하는 것이다.
월악신사는 덕주사와 마애불이 있는 덕주산성 부근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지만,
현재의 덕주계곡 입구의 (하)덕주산성은 임진왜란 이후에 축조된 것이며,
마애불과 월악신사 있는 (상)덕주산성이 고려시대 대몽항전 시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몽고군이 전국토를 유린한 상황에서 폐허가 된 덕주산성과 와룡산성으로 피신하여
전열을 정비하여 제천 박달현 전투(1258년)를 이끌어 낸 것이 아닌가 한다.
제천지역은 구한말 의병활동 뿐만 아니라,
대몽항전 시에도 크게 활약한 지역이라
이번 답사에서도 서늘한 기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 서늘함은 월악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역사의 향기가 아닐까 ?
세종지리지/충청도/충주목 /◎ 청풍군(淸風郡)
○ 명산(名山)은 월악(月嶽)이요,【신라 때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하였다.】
○ 월경처(越境處-고을의 경계가 고르지 아니하여, 어느 한 부분이 이쪽 고을로 깊숙이 들어오거나 저쪽 고을로 깊숙이 들어간 곳)는 충주(忠州) 임내의 덕산향(德山鄕)과 소을림 부곡(所乙林部曲)이 터무니없이 군(郡)의 남촌(南村)에 들어와 있다.
신증동국여지슴람 제 14권 충주목
월악산(月岳山) :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덕주사(德周寺) : 월악산(月岳山) 밑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이 절을 세웠기 때문에 인하여 이름하였다덕주산성(德周山城) : 주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6백 70척이고, 안에 샘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페하였다.
월악사(月岳祠) : 월악산(月岳山)에 있다. 고려 고종(高宗) 43년(1256)에 몽고(蒙古) 군사가 주의 성을 무찌르고 또 산성(山城)을 공격하니, 관리들이 늙고 약하여 막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산사로 올라갔는데, 홀연히 구름 안개ㆍ비ㆍ우레ㆍ번개가 크게 일어나자, 몽고 군사들이 신이 돕는 것이라고 여겨 치지 않고 물러갔다.
덕산(德山) : 본래는 덕산향(德山鄕)인데, 동남쪽으로 처음이 55리, 끝이 1백 5리.
고려사절요/제17권/고종 안효대왕/을묘 42년(1255)
冬十月(동십월) : 겨울 10월에 蒙兵踰大院嶺(몽병유대원령) : 몽고병이 대원령(大院嶺)을 넘으니, 忠州出精銳(충주출정예) : 충주에서 정예 군사를 내어 擊殺千餘人(격살천여인) : 1천여 명을 쳐 죽였다.
고려사절요/제17권/고종 안효대왕/병진 43년(1256)
蒙兵(몽병) : 몽고병이 屠忠州城(도충주성) : 충주성을 도륙하고 又攻山城(우공산성) : 또 산성을 치니, 官吏老弱(관리로약) : 관리와 노약자들이 恐不能拒(공불능거) : 막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登月嶽神祠(등월악신사) : 월악신사(月嶽神祠)로 올라갔다. 忽雲霧(홀운무) : 홀연히 운무가 자욱하며 風雨雷雹俱作(풍우뢰박구작) : 바람ㆍ비ㆍ우레ㆍ우박이 함께 몰아치니, 蒙兵以爲神助(몽병이위신조) : 몽고 군사가 신령의 도움이 있다 하여 不攻而退(불공이퇴) : 치지 않고 물러갔다.
(등곡산-월형산 등산지도)
천년고찰 고산사를 품고있는 와룡산성(충북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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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사 표지석 | ||
충주에서 단양 쪽으로 36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월악나루를 지나 덕산에서 내려오는 성천과 월악에서 내려오는 광천이 합류하는 다리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면 곧바로 왼쪽으로 신현주유소가 나오는데 이 주유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고산사가 나오고 이 절을 둘러싸고 있는 성이 와룡산성이다.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덕산면 신현리(용바위)와 한수면 덕곡리와의 사이에 산(527.5m)의 능선을 서북벽으로 삼아 남동쪽 신현리 방향의 계곡을 둘러싸고 있다. 길이 가파르기는 하지만 승용차로도 고산사 앞까지 올라갈 수 있다. 와룡산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삭토와 토축으로 된 북벽·서벽·남벽이 있고, 동벽의 경우는 능선의 바깥쪽 비탈을 따라 석축으로 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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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있는 성벽. | ||
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다란 장방형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사방이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이고 4∼5개의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는 전형적인 고로봉형식을 따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2,750m이고 북서쪽의 높은 능선에서 낮은 동남쪽 산줄기를 따라 성벽이 만들어져 있다. 주요한 통로는 동쪽과 남쪽이 되며 성내의 물은 동벽의 경사면 일부를 제외하고는 동쪽 계곡 한곳으로 모여 배수된다. 와룡산성의 수구 부분은 현재 고산사로 들어가는 입구로 새로 축조한 돌담으로 막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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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룡산성 동벽 내외 겹축성벽과 기둥홈 | ||
이 산성은 동쪽 계곡으로 나있는 통로 이외에는 모두가 험한 길로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 북쪽과 남쪽에는 각기 능선의 가장 낮은 부분을 통과히는 문지(門址)가 있어 계곡을 통하여 통행이 가능하지만 성의 외측으로는 가파른 길이 나있다. 능선으로의 길은 봉우리마다 능선을 따라 통행이 가능하며 서남쪽과 서쪽·북쪽·동북쪽으로의 능선이 있다. 하지만 동쪽 성벽의 통과선인 능선은 거듭된 단층성 암반이 비탈을 가로막고 있어 거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다만 동남쪽의 경우 문지와 암문이 있어 양짓말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통로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와룡산성에 올라보면 한가지 의문점이 발견된다. 이제껏 보아왔던 성들의 위치를 보면 육로나 수로를 차단하고 있는 모두가 한결같이 지형적으로 요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와룡산성은 외떨어진 산골에 자리잡고 있다. 인접하여 코앞 송계에는 겹겹이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중의 요새 덕주산성이 버티고 있고, 와룡산성은 남한강 수로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다.
이러한 위치는 오늘날에는 궁벽한 산골에 해당되지만 과거에는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교통로를 제어하는 위치이다. 즉 남한강의 요충지인 충주에서 동남쪽으로 통하는 가장 주요한 교통로인 죽령대로와 충주에서 죽령을 거치지 않고 바로 문경의 동로면으로 통하는 모녀현로를 동시에 막을 수 있는 위치가 바로 와룡산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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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룡사 입구의 석축 벽 | ||
모녀현로는 덕산면 도기리와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 벌천리 사이의 고개로서 한강수계와 낙동강수계의 분수령상에 있다. 즉 와룡산성의 남쪽 입구를 흐르는 냇물은 바로 이 모녀현에서 발원한 물이며 이 냇물을 거슬러 올라 모녀현을 넘으면 곧바로 문경의 벌천에 이르게 된다. 죽령을 넘지 않고 예천·문경 방면에서 북으로 벌렁재를 넘어 단양천 상류로 해서 다시 서쪽으로 모녀치를 넘어 성천을 따라 충주로 오는 직로가 된다. 이런 점에서 와룡산성은 남한강 남쪽 언덕에 있는 요충지로서 죽령대로 뿐 아니라 덕산면 지역을 지나는 또 하나의 옛길인 모녀현로와 꼬부랑재를 막는 중요한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덕산에서 만난 60∼70대 노인들을 통해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경상도 소장수들이 소짚신을 신켜 벌렁재를 넘어와 덕산장을 보곤 했다라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백두대간을 넘는 죽령·새재·추풍령 외에도 많은 고개를 통해 왕래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와룡산성이 사용되었던 시기는 성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성벽의 축조방식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인데 기와류나 토기 파편들이 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것들이고, 축조방법에 있어서도 고려시대 내륙지역에서 유행하던 석축 방식이 사용된 점을 미루어 이 산성이 고려시대까지 사용되다가 조선시대에는 이미 잊혀진 산성으로 존재하였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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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사 삼성각과 응진각. | ||
룡산성 안에는 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고산사가 있는데, 현재의 불사는 1956년 병신년에 월하스님이 중창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고산사의 대웅전에는 다른 불사에서는 볼 수 없는 탱화가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좌우 3구의 나한(부처의 제자)탱화(벽에 거는 그림)가 바로 그것이다.
탱화는 글을 알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알려주기 위한 배려에서 그려진 불교에 관한 그림이다. 한창 단청을 그리며 고산사 응진각에서 일하던 서울 인부들 중 한사람이 응진각 뒤 바위에 쓰여진 한자를 알려주었으나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잘 정돈된 산성을 답사하는 것도 좋지만 허물어진 산성의 자취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옛사람들의 체취를 느껴보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또 다른 색다른 느낌이었다.
와룡산성을 내려오는 길에 전국적으로 정평이 나있는 약초장이 열리는 덕산장을 들렀다. 덕산면은 예로부터 약초로 이름난 곳이며 지금도 월악산에서 나는 약효 뛰어난 약초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약초상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모처럼만에 보는 시골의 오일장에서 예전의 왁자지껄했던 장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푸근한 인심은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옛 정취여서 마냥 즐겁기만 했다.
“이전 대면 아무 것두 아니지.”예전의 영화가 못내 아쉬운 탓인지 장터의 목로에서 만난 촌로가 막걸리 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 촌로의 말에 의하면 하설산 정상부에도 허물어진 돌무더기가 있단다. 하설산은 월악산과 문수봉 사이에 있는 백두대간의 길목에 있는 산으로 그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 나무를 하러 여러 번 올랐었는데 무너진 돌무더기가 여기저기 있단다. 분명히 산성이 있을 법한 곳이기는 했지만 직접 올라 확인할 길은 없었다.
1. 관세음보살 : 보살의 하나. 아미타불을 왼쪽에서 모시고 있는 보살로 대자대비를 그 근본 서원으로 하며 중생이 그의 이름을 정성으로 외면 화신하여 구제한다고 한다. 2. 청풍문화재단지 : 제천군 청풍면 물태리에 있으며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역에 산재한 각종 문화재를 한자리에 모아 조성한 곳으로 단지의 구성은 관아·민갇향교·석물군으로 나누어 배치하여 옛 고을의 모습을 축소, 재현시키고 있다. 특히 고가내에는 1,600여 점에 달하는 우리 전통의 생활유물을 전시하고 있어 역사문화의 산교육장으로 많은 탐방객들이 찾고 있다. |
신현리 용바위에서 바라본 덕산
신현리 용바위에서 바라본 고산사 입구와 월형산
고산사 입구
와룡산성 남측성문
와룡산성 남측성문
와룡산성 남측성문 앞 고산사 표지석
와룡산성 안내판
고산사 전경
고산사 전경
고산사 응진전
고산사 응진전
고산사 응진전
고산사 응진전
고산사에서 바라본 덕산
고산사에서 바라본 덕산
고산사에서 바라본 덕산 용하계곡
고산사에서 바라본 월형산
고산사에서 바라본 월악산
고산사에서 바라본 용하계곡
월형산에서 바라본 등곡산
월형산에서 바라본 상탄지와 충주호(월악산 입구)
월형산에서 바라본 상탄지와 충주호(월악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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