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자취를 밟으며

충주의 3대 철불좌상과 충주철산

산골어부 2011. 11. 20. 01:47

 

불상 중에서 가장 주조하기 힘든 것이 철불이다. 고려시대의 철불은 금동불과 달리 친밀감이 떨어지며 자태가 아름답다기 보다는 고뇌에 찬 고행의 부처가 연상되며 현존하는 불상들도 석불과 금동불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청동불과 목조불도 불상의 부식과 미관 때문에 금박으로 그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철불주조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  아마도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부터 시도 되었을 것이다. 철기문화를 바탕으로한 무기의 발달과 더불어 철불이 주조되었겠지만, 철불보다는 금동불이 현재까지도 유행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이는 철불이 무쇠로 주조되었기 때문이다. 철불의 제조방식이 주조가 아닌 오늘날의 강철기술인 합금술과 용접술로 발전하였다면 황룡사 구층목탑보다도 더 크고  더 섬세하고 아름다운 불상으로 태어났을 것이다.

 

 충북 괴산군에서 주조한 초대형 가마솥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조소와 비난을 던진 일이 불과 몇 년 전에 있었다. 초대형 가마솥을 주조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무쇠솥은 한민족의 식생활과 뗄 수 없이 널리 퍼져있는 대중문화의 생활도구이다.  그리고 무쇠의 특성을 극복하고 초대형 무쇠솥을 만든 것은 대단한 역사이다. 괴산의 초대형 가마솥이 수 백년 후에도 존재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국보급 문화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사관에 멍들어 있는 일부의 사람들이 괴산고추축제에 한번 밖에 쓰이지 않는 낭비성 예산을 들먹여가며 초대형 무쇠솥의 가치를 폄하하고, 현행 선거법을 적용해가며 행사용으로도 사용할 수 없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된 철불로는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到彼岸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과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이 있으며,  충주에는 보물로 지정된 철불이 3점이 있는데,  일명 "충주의 3대 철불좌상"이다. 충주의 3대 철불좌상은 국보로 지정된 비로자나불과 달리 석가여래불로 추정된다. 특히 충주 대원사에 모셔진 철불좌상은 "광불(狂佛)"로 여기는 민심 때문에 온갖 수모를 겪으며 옮겨 다니다가 대원사 극락전에 모셔져 있는데, 철불은 사찰의 주존불이 아니라 무량수전 옆의 극락전에 모셔져서 아직도 그 수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대원사도 십 여년 전에 화재로 소실되어 최근에 다시 중창되었고, 대원사 철불좌상에 따른 유래와 수난사에서 당시의 충주지역이 얼마나 심한 혼란기를 겪었는가를 엿보게 하는데, 이는 용산과 용정으로 불리우던 지역이 질병 또는 전란으로 폐허가 되면서 그를 극복하기 위하여 염바다 또는

염해천이 등장하고, 견훤을 지렁이로 빗대는 민담까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만들은 불상이 무슨 신통력이 있겠는가 ?  이 모든 수난의 역사는 남을 탓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의 두치 혀에서 기인된 것일 뿐이다.

 

역사학계나 불교계에서는 철불의 주조가 고려의 신흥 세력인 지방호족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지만, 고려시대에도 철불보다는 금동불이 주로 만들어졌으며 고려의 신흥세력이 철불을 만들었다기 보다는 철기문화가 단순한 무기나 농기구의 제조에서 생활도구인 가마솥과 전쟁무기인 화포나 수레 등을 제조하는 기술로 발전하면서  그 기술이 찰불이라는 예술품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무쇠로 주조하는 철불은 녹과 균열이라는 결함을 극복하지 못한데다가 철불에서 풍겨 나오는 이미지가 투박하고 부드럽지 못하고, 금동불처럼 금물을 입히는 것이 쉽지않아  퇴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충주의 3대 철불좌상"을 돌아보며, 사라져간 충주의 철산지와 철기소들을 연상하며 그 역사가 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보내는 것일까 ? 를 생각해본다.  중원의 역사는 철산지와 뱃길에서 시작되었다고해도 과연이 아닐 것이다. 충주철산과 남한강 뱃길은 산업의 근대화로 쇠락해버렸는데, 충주가 왜 그를 기반으로 새로운 변혁에 적응하지 못하고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로 전락한 것은 철불좌상의 주조기술이 발전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과 비슷하다. 혹자는 공업단지와 물류체계를 이야기하지만, 공업도시는 역사에 등장하는 향.소.부곡과 같은 것이다.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중원문화가 정치적 경제적 중심에서 문화와 예술을 창출하는 자존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즉 충주의 역사를 미화하고 에찬만할 뿐 그를 다시 되새기고 고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충주 백운암 입구

 

충주 백운암

 

충주 백운암 대웅전

 

충주 백운암 대웅전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안내문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충주 단호사

 

충주 단호사

 

충주 단호사 대웅전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안내문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충주 대원사에 본 충주시내

 

충주 대원사 무량수전

 

충주 대원사 극락전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  안내문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

 

 

충주 대원사 철조여래좌상

 

충주는 쇠부리업의 메카였다(디지털충주문화대전에서)

 

  • [개설]

    충주 지역은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로 고대부터 철광산이 개발되어 철광석을 캐고, 쇠를 뽑고 녹이고 두드려 각종 무기나 농구 등의 연모를 만들던 쇠부리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고대 국가의 힘의 상징인 철을 확보하기 위해 삼국은 공히 충주 지역에 공을 들였으며 충주 지역을 확보한 국가가 항상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충주는 질 좋은 철을 생산하던 자원의 보고였기 때문에 누구나 탐내던 고장이었고 ‘남방의 인후(咽喉)를 질러 막는 곳’이라고 표현한 정인지 말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사통팔달의 요충으로 한반도의 중심이 되었던 고장이다. 철의 산지로 고대와 중세의 역사에 중심이 되었던 우리 고장! 근세에 접어들며 철의 비중이 약화되고 하운(河運)이나 조령·죽령으로 통하던 육상 교통로의 역할도 약화되어 점차 그 기능을 잃어 낙후된 고장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철의 고장으로서의 전통은 결코 약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현대적으로 표현되는 철의 고장으로서의 상징은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표출될 수 있지 않을까.

    대몽항쟁의 전승지로서의 전통은 근대에 이르러 동학으로 표출되고, 임진왜란 때 백기당·조웅·조덕공의 의병 정신은 일제에 맞서는 유인석의 의병 전쟁으로 나타났던 우리 고장이 아니던가. 자원으로서의 철이 아닌, 굳센 강철의 정신력으로 현대에 있어 역사와 문화의 중심 고장으로 새롭게 가꾸어야 할 것이다.

  • [고대 전쟁에서 철제 무기의 중요성]
  • 충주충청북도 내에서는 동북부 지역에 속하는 곳으로 일찍부터 우리나라 3대 철산지의 하나였다. 현재는 모든 철광이 폐광되어 운영되고 있지 않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이류면 만정리충주철산, 괴산 불정면 관전리어래철산, 가금면 창동리창동철산, 충주시 연수동연수동 철산, 이류면 금곡리금곡철산 등에서 철광산이 운영되고 있었다.

    충주에서는 빈철·납·강철·연철 등이 생산되어 철로 만들 수 있는 모든 도구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고대부터 충주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물론 충주이중환『택리지(擇里志)』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강 상류이어서 물길로 오가기 편하였던’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고대의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철의 주요 산지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이 충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치열한 싸움도 바로 철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전투에 있어서 무기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될 만큼 큰 역할을 하였고, 전시에 있어서도 각종 무기류를 비롯한 군수품 공급은 끊임없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때 철광의 존재는 각종의 철제품을 생산하는 노동과 함께 전쟁의 승리를 보장하는 척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 [철 생산이 시작된 시기]
  • 충주에서 철이 생산된 것은 철기가 우리나라에 쓰이기 시작한 철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으나, 철기시대의 유적에서 철제품이 출토되기는 하나 생산되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철이 생산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 자료는 희박하나 충주 지역을 백제가 선점하였을 때인 근초고왕 무렵 이미 최고 수준의 철기가 제작되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백제 왕이 370년에 일본 왕에게 하사한 일본의 국보 칠지도의 경우 그 생산지가 어디였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4세기 후엽의 첨단 기술을 응용하여 만든 칠지도는 1,500년이 지난 지금도 녹슬어 부서지지 않고 잘 남아 있는데, 이는 당시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반증하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칠지도의 생산지를 곡나철산(谷那鐵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철산이 어디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곡나철산의 위치로 여러 곳을 비정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타당성이 있는 곳 중의 하나가 충주이다. 아직 충주에서 증거 자료가 출토되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가까운 인근에 있는 진천석장리에서는 백제 초기의 야철지가 발굴되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진천 석장리에서 발굴된 야철 유적에서는 일본의 제련술보다 200년이나 앞서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진천 석장리 주변에서는 아직 철광산의 흔적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진천 석장리에서는 사철과 철광석이 모두 이용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철광석은 충주 쪽에서 운반된 것으로 추론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충주 근방 어디엔가 칠지도를 만들었던 곡나철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충주의 명현으로 일컬어지는 신라의 대문장가 강수(强首)가 대장간집의 딸과 혼인하였다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고, 고려시대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다인철소의 사람들이 몽고군을 막아내어 익안현으로 승격하였음도 이러한 철의 문화가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쇠부리 기술의 총아, 철불]

     

    충주가 철의 고장임을 증명하는 뚜렷한 증거물은 이 지역에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철제 불상 3구이다. 충주 대원사에 위치한 충주 철불좌상(보물 제98호)과 단호사 철불좌상(보물 제512호), 엄정 백운암의 주존불로 안치된 철불좌상(보물 제1527호) 등 현재까지 발견된 20여 개의 철불들 중 충주에서만 3구가 있다는 사실은 이 고장이 철의 산지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대원사충주 철불좌상은 광불거리에 있던 것을 충주 관아에 안치하였다가 근년에 대원사 경내로 옮긴 것인데 고려시대 밀교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불상이다. 철불의 모습은 큼직한 나발의 머리에 뚜렷이 육계가 표현되었으며, 반개한 양눈 사이에는 백호공이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통견의 법의엔 V자형 의문이 돌려 있고 가슴에는 군의의 결대가 보인다. 수인은 두 손이 모두 결실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무릎 부분이 동체에 비하여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단호사 철불좌상은 충주 철불좌상과 동일한 장인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일 만큼 전체적으로 주는 느낌이 동일하다. 다만 백호가 남아 있고, 가슴 앞에서의 옷 무늬의 처리가 대원사의 것이 3돌 줄기의 U자형을 이루는데 비하여 단호사 철불좌상은 6줄로 표현되는 등 몇 가지 작은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충주 백운암 철불좌상도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대원사단호사의 철불보다는 전체적인 모습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나 먼저 제작된 것으로 고려 초기에 유행하던 고려 철불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충주 지방에 전하는 이 3구의 철불은 후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등장한 고려의 신흥 세력들에 의해 유행처럼 만들어진 것이겠으나, 충주 지역의 자원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였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 명칭 :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
    • 주소 :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223
    • 시 대 : 고려
    • 유 형 : 불상
    • 지 정 : 보물
    • 지정번호 : 보물 제1527호
    • 지정일자 : 2007.10.24

    백운산 아래에 있는 백운암의 철조여래좌상은 아래와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왕후가 충주지방으로 피신을 왔을 때 한 무당이 곧 환궁하게 될 것을 예언 했는데 예언대로 곧 환궁하게 되자 무당을 서울로 불러 진령군여대감의 벼슬을 내렸다.
    하루는 이 여대감의 꿈에 백의철불이 나타나 지금 이 사지에 안치해 달라고 하므로 그 자리에 절을 건립하여 백운암이라 하게 되었다 한다. 그후 이 절은 중창되었는데 법당은 1977년에 완공하여 지금의 모습을 하였으며 주존불로 안치된 불상이 쇠로 된 철불좌상으로 전면에 금칠을 하고 있다.
    나발의 머리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상호는 원만하여 위엄과 자비가 넘친다. 우견편단의 법의는 가슴속으로 부터 무릅에 이르기까지 평행 원호를 그리면서 흘렀고 양 무릎을 자연스럽게 덮고 있으며, 두손을 자연스럽게 양쪽 무릎에 놓았다. 고려시대 12세기경의 우수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앉은 높이 90cm, 어깨폭 40cm, 가슴폭 70cm이다. 이 암자에는 또한 반자가 있으니 <바라>라고 불려지는 징 같이 생긴 종의 일종이다. 직경 43cm, 두께폭 10cm인데 장식으로는 5개의 연과를 가진 자방이 있고 그 주변에 12판의 연화문을 돌렸으며 그 밖으로 3줄의 돌기선을 그었다.

    충주 철조여래좌상

    • 명칭 : 충주 철조여래좌상
    • 주소 : 충주시 지현동 587-12
    • 시 대 : 고려
    • 유 형 : 불상
    • 지 정 : 보물
    • 지정번호 : 보물 제98호
    • 지정일자 : 1963. 1. 21(35.5.24)

    이 불상은 현재 대원사 앞뜰에 안치되어 있으나 충주공고옆 노천에 방지되었던 것을 중원군청으로 옮겼다가1959년 12월 15일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한 면의 길이가 97cm 높이 65cm의 비교적 큰 규모의 화강암 탑신석위에 안치된 철불의 머리는 나발인데 육계는 작은 편이며 미간에는 지름 2.5cm의 백호공이 있다. 상호는 이마가 넓고 턱으로 내려 올 수록 좁아져서 양쪽 볼에 살이 빠졌으므로 풍만한 인상을 주지 않으나 단아한 감을 느낄 수 있다.
    눈섭은 가늘게 반원형으로 그리고 눈은 반만 뜨고 시선은 밑을 향하고 있으나 눈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게 조각하여 괴상해 보인다. 상호에 비해 코는 작으며 인중이 짧고 입술이 도톰해지는 등 고려시대 불상에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슴과 어깨가 넓고 당당하며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앞에 길이 10cm의 군의 매듭을 양각시켜 표현하였다. 옷주름은 3줄의 돌기선으로 표현되어 팔에서는 사선을 그엇고 가슴 밑에서 "U"자 형을 만들었으며 불신 뒷면의 의습처리는 오른편으로 처리하여 도식화 하였고 뒷면 중앙부에 광배를 장식했던 흔적이 보인다.
    불상 전체에 비해 무릎이 넓어서 안정감을 주고 있고 두 다리가 수평되게 평행선을 그엇는데 모두 융기 선으로 되어 있어 힘있게 느껴지는 반면 매우 형식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무릎 밑에서 올라간 굵은 3줄의 음각선과 양다리 사이의 삼각형 옷주름 양식 등은 완전히 도식화하였다. 양 수인이 절단된 상태여서 석가여래인지 약사여래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 상호에서는 인상과 인체 묘사에 착실함이 부족한 점과 의문을 형식화 내지 도식화 한 것 등을 종합할 때 11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유행은 통일신라 하대부터 성행된 것이나 고려시대의 불상은 무엇보다도 그 조각 기술에 있어서 신라보다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거대한 조각에 있어서 퇴화의 모습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 명칭 : 충주 단호사 철조여래좌상
    • 주소 : 충주시 단월동 455
    • 시 대 : 고려
    • 유 형 : 불상
    • 지 정 : 보물
    • 지정번호 : 보물 512호
    • 지정일자 : 1969. 7. 18

    현재 단호사 법당의 주존불로봉안 되어 있는데 이곳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석탑이 있고 단호사의 현 주지가 1945년에 이자리에 불상이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절을 이룩한 점으로 단호사철불은 원래 이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원체 짙게 개금불사되어 오랫동안 철불인지 모른 채 지내오다가 1968년도에 철불로 밝혀졌다. 나발의 머리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양 미간의 백호공에는 새로 만들어 끼운 백호가 있으며 두 눈과 코, 입술등이 정제되고 균형잡혀 있다. 양쪽 귀는 길게 늘어지고 목에는 삼도가 돌려져서 위엄이 있어 보이며 상호가 원만하여 더 한층 근엄한 인상을 준다. 통견한 법의는 배꼽 앞에서 유려한 활 모양의 원을 그리면서 양쪽 팔에 걸쳤으며 양쪽 어깨에서 넘겨진 의문은 뒷면에까지도 조식되었고 가슴에는 의대와 그 밑으로 군의의 결대가 보인다.
    양쪽 무릎에 의문이 조각 되었고 그 위에 양쪽 발바닥이 노출되었으며 양 무릎 가운데에 산형의 앞자락이 펼쳐졌는데 그 조각은 단정하다. 수인은 양쪽 손가락 부분이 모두 파손되어 있던 것을 근래에 원형복원하였다. 이 철불은 육계와 상호 그리고 양쪽 무릎 의문 등 각부의 양식 및 조성수법으로 보아 그리고 특히 주조 자료가 철이라는 점이 대원사에 봉안되어 있는『충주철불좌상 (보물98호)』과 흡사하여 양 불상은 동시에 주조되었거나 한사람에 의해 조성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동체에 비하여 무릎이 넓직하여 안정감을 주고 있어 균형잡힌 조성이다.
    상호가 원만하나 전대에서 볼 수 있는 허심탄회한 부처님의 미소는 사라지고 근엄한 표정으로서 단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시대적 변화라고 보겠다. 제작년대는 11세기 경으로 추정되는데 이 불상은『충주철불좌상』과 함께 고려시대 철불의 중요한 유품이며 유사한 양식을 갖춘 2구의 철불이 이 지역에 전하는 점은 고려시대 철불조성에 있어 지방적 양식이 잘 표현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종 목 국보 제117호
    명 칭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분 류 유물 / 불교조각/ 금속조/ 불상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1963.02.21
    소 재 지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보림사
    시 대 통일신라
    소 유 자 보림사
    관 리 자 보림사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팽창된 체구와 가슴의 표현 등은 당당해 보이면서도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 들었고, 몸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손과 넓은 무릎은 불상의 전체적인 균형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到彼岸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종   목   국보   63호
    명   칭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到彼岸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분   류   철불
    수   량   1구
    지정일   1962.12.20
    소재지   강원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450 도피안사
    시   대   통일신라 경문왕
    소유자   도피안사
    관리자   도피안사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