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자취를 밟으며

진천 대모산성과 독바위

산골어부 2011. 11. 21. 00:06

 

진천의 대모산성과 도당산성, 증평의 이성산성과 청주의 부모산성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 진천 대모산성에서 진천 만뢰산을 바라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신라 진흥왕 때의 김무력과 그의 아들 김서현 그리고 손자인 김유신이다. 신라 진흥왕 때부터 이어지는 삼대에 걸친 삼국의 전쟁에서 한강의 교두보인 충주와 금강의 교두보인 보은을 점령하고 서해 바다로 나가는 안성과 평택을 수호하는 기지로 진천을 택한 것은 아닐까 ? 


칠현산 자락의 병무관과 엽돈재의 서운산성. 그리고, 죽산의 망이산성 등 진천지역에는 남한강변처럼 거대한 석성이 아니라, 초라한 토성과 작은 석성이 있을 뿐이지만,  한강과 금강의 분기점인 칠장산에서 만뢰산에 이르는 금북정맥(옛 차령산맥)에는 한강유역을 점령하기 위한 치열한 흔적들이 산재한다. 진천의 대모산성을 돌아보며 이 초라한 토성에서 무슨 전쟁을 치룰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을 하겠지만, 적대국을 공격하는 전투형 진지는 견고하고 큰 산성이 아니라, 수많은 대군이 머물러 야영을 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평지성이 유리하다.  하지만, 평지성은 적의 공격에 취약하기에  패전 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유역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에서 대모산성은 금강유역의 백제를 공격하는 중요한 거점이었을 것이다.  대모산성과 마주하는 도당산성과 만뢰산 정상의 망루를 바라보며 김유신 장군의 사당인 길상사와  태령산의 태실은 승자에게 주어지는 훗날의 영광스러운 기념물이 아닐까 ? 진천의 대모산성을 뒤로 하고 무심천과 미호천이 만나는 까치내 정북동 토성으로 향하는 길모퉁이에 서있는 삼덕리 유래비와 독바위는 참으로 신기하다.  돌덩어리 하나없는 진천뜰을 바라보는 바윗돌. 항아리처럼 생겼다는 옹암마을의 독바위는 그 전설만큼이나 아름답게 보였다.

 

 

진천 대모산성(鎭川 大母山城)

 

할미성이라고도 불리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의 대모산성은 『삼국사기』 전투기사에 보이는 모산성(母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끼고 낮은 구릉지 위에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내·외성과 자성(子城)을 갖춘 특이한 형식이다. 성의 총길이는 1,260m에 이르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문터로 짐작되는 자리가 있다. 내성의 벽은 자연지형을 충분히 이용하여 흙을 층층이 다져서 쌓았고, 외성의 벽은 아래 기초부분에 자갈돌을 넣고 점토가 많이 섞인 흙을 채웠다. 성의 외부는 경사가 급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나 안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성안에서는 선사시대 이래의 석기와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었으며, 성의 바깥에서는 최근에 백제 초기의 저장구덩이와 더욱 오래된 시기의 무덤자리, 신라의 돌방무덤이 조사되었다. 이 성은 고려시대 초기에 진천지역 호족인 임희(林曦)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개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고대사회의 행정구역과 산성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진천 도당산성(都堂山城 )


진천읍에서 서남쪽으로 약1km지점에 위치한 도당산의 정상부에 삼국시대에 쌓은 석축 산성. 진천읍에서 청주로 가는 국도변 오른쪽 도당산 중턱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장군의 사당인 길상사가 있는데, 이 사당을 중심으로 그 뒤쪽 해발 약 20m의 산정상부를 둘러싸고 축조된 석성이다.

석축의 둘레는 약 824m정도인데, 대부분은 급경사면을 이루고 있는 지형적 특성상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특히 북서족 능선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자연적인 요새지로도 적합한데, 실제로 많은 부분은 자연적인 지형을 거의 그대로 이용했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전서에 의하면 이 성은 김유신장군이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하루만에 쌓다고도 하고, 당나라 소방군과 함께 주둔하면서 고구려군을 방어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문헌길록에 따르면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천현 고적조에 '도당산성은 현의 서쪽 3리에 있으며, 석축으로 둘레는 1,636척이고 성내에는 우물이 2곳에 있다.
지금은 폐지됐다.'라고하고 있고, 이후의 문헌기록에서도 폐지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이미 조선초기에는 이용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성내의 우물은수량이 풍부하여 최근까지도 남아 있었느데, 길상사 오른쪽의 우물은 길상사 흥무전을 개축할 때 매몰되었다고하며, 왼쪽의 우물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鎭川-할미성 축성설화의 전형 대모산성(大母山城)
자료출처 :- 충북학 연구소

대모산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춘 성곽(城郭)이다. 마을사람들은 이를 각각 ‘안썽’과 ‘배깥썽’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의 진천군 진천읍 성석리 산 1-5번지 일원에 있는 대모산성은 1990년 8월 백제초기의 저장구덩이가 조사되었고, 9월에는 성의 북쪽 낮은 구릉에서 원삼국기의 무덤과 통일신라의 석실분이 조사되어서 그해 12월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 83호로 지정되었다. 음성군에서 발원하여 미호천에 합류하는 하천은 초평천과 한천천이 있다. 초평천은 음성군 맹동면에서 군자천으로 서남류하여 초평천에 합류하여 미호천으로 흘러든다. 다른 하나는 음성군 금왕읍에서 한천천으로 합류되어,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는 칠장천, 회죽천, 장양천을 합류한 미호천과 진천군 문백면과 초평면의 경계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한편 진천읍을 서북에서 동남으로 관통하여 미호천에 합류하는 것이 백곡천인데 이 백곡천이 읍내리에 이르러 하천의 남북으로 넓은 들판을 형성하게 된다. 이 들판의 북쪽 낮은 구릉에 대모산성이 위치해 있다. 남쪽에는 괸돌(고인돌)마을이 있다. 어원으로 보면 ‘할미성’ 혹은 ‘할미산성’으로 부르던 것을 한자화하여 ‘대모성(大母城)’ 또는 ‘대모산성(大母山城)’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주민들은 아직도 ‘할미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모산성의 축성과 관련해서는 ‘할머니들이 머리에 돌을 이어 날라서 쌓았다’고 전해오는 ‘할미성’ 축성설화를 갖고 있다. 또다른 남매축성설화도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남매 장사가 태어났는데, 이들 한명이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기에 둘이 내기를 해서 이기는 자를 살리기로 하였다. 부모는 아들을 살리고 싶은 욕망에서 아들에게는 인절미를 먹고 농다리를 만들게 하고, 딸에게는 뜨거운 팥죽을 먹고 치마폭으로 돌을 날라 성을 쌓게 하였는데 결국 아들이 먼저 쌓아 딸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대모산성이 석성이 아닌 토성이라는 점, 또 농다리는 고려시대의 다리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후세에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진천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의 가장 북쪽 상류지역이 되고, 여기에 잘 발달한 진천평야는 진천들, 덕산들, 이월들로 불리우는 비옥한 농경지대로서 양질의 쌀이 생산되는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덕산면 산수리와 이월면 삼용리 일대에서는 중부고속도로 유적조사에서 백제 전기의 토기가마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적의 위치가 바로 할미성과 2.3㎞ 거리에 불과한 가까운 거리에 있다. 후에 산수리 중방마을과 삼용리 수청마을의 토기가마는 1988년과 91년에 각각 국가사적 325호, 324호로 지정되었다. 할미성은 진천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토성으로서, 주변에 다른 산성들이 축조되면서 그 원래의 기능을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근의 도당산성과 만뢰산성, 그리고 태령산의 태령산성은 진천지역이 진흥왕대에 백제와 함께 한강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6세기 중엽에서 말엽이전의 시기와 관련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1980년 민덕식(현재 국사편찬위원회 근무)의 실측 결과에 의하면 내성 416.4m, 본성 609.6m, 외성 649.2m로 본성과 외성을 합한 둘레가 1258.8m로 조선시대의 문헌기록과 비슷하다. 민덕식의 대모산성에 대한 분석을 요약하면, 첫째 대모산성은 삼국사기의 모산성에 비정된다. 즉 서기 484년 고구려가 이곳을 공격하자 나제연합군이 저지시켰으나 결국 고구려에게 점령당했다. 두타산성은 신라의 실죽과 관련된 전설 등으로 보아 486년 이후 494년 보다 앞선 시기에 축성되었다. 둘째, 서기 649년의 기록에 나오는 석토성(石吐城)은 진천의 문안산성(文案山城)으로 비정되고, 도살성(道薩城)은 이성산성(尼城山城)으로 비정된다. 셋째, 고구려에게 대모산성이 점령되자 도당산성이 대신하여 이 지방의 주성(主城)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전투가 격렬해지자 도당산성은 백제와 대치하던 이흘산성(伊訖山城, 萬賴山城) 등 최전선에 보급물자를 지원하던 지원기지로서, 이 지방의 군자적 지휘처로서 문안산성과 도서성(都西城)의 엄호를 받으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대모산성은 그 기능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넷째, 대모산성은 통일신라 때 폐성화 되었다가 통일신라 말기 지방의 호족들이 발흥할 때, 이 지방 호족인 임희(林曦)에 의해 개축되어 사유화(私有化) 되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이 때 개축된 모습이다. 이 산성은 북쪽에 동서로 뻗은 봉우리 11좌(座)를 연결한 자연지세를 북벽으로 삼고, 서쪽 편의 낮은 봉우리에서 남쪽으로 달리는 능선을 서벽으로 하며, 북쪽 중앙의 봉우리에서 서벽과 평행하는 능선을 중벽으로 삼고, 동쪽끝의 봉우리에서 중벽과 평행하는 능선을 동벽으로 삼은 후에 이 벽들의 남쪽 끝 사이를 막아 남벽을 만드는 등 지형조건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이 산성을 크게 나누면 서쪽 최고봉을 장대(將臺)와 중심으로 삼는 본성과, 동쪽의 최고봉을 장대로 삼는 외성으로 구분되며, 다시 본성 안에 동서로 토루를 쌍은 내성이 있어 3겹성을 구성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어 테뫼식과 포곡식의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진천읍에서 동쪽 1㎞ 지점 신정리의 걸미산(傑尾山)에는 옛기록에는 전하지 않는 토성이 하나 있는데 지역에서는 걸미산성이라 부른다. 지금은 공동묘지가 되어 일부 토루의 흔적만 찾아 볼 수 있는데, 대모산성과는 백곡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대모산성을 향해서 40°의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는데, 입지 조건으로 보아 대모산성이 함락되었을 경우 백곡천을 해자(垓字)로 삼아 항전하려는 목적으로 축조된 성으로 추측된다. 한편 할미성에서는 철생산과 관련된 유적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덕산면 석장리, 달가리 등의 철생산 유적과 관련하여 진천지역이 백제의 중앙지역에 철을 공급하였던 일종의 첨단산업지대를 형성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한편 삼용리와 산수리의 대규모 백제초기의 토기가마로 볼 때, 철생산 뿐만 아니라, 토기의 대단위 제작단지로서의 기능도 알려져 있다. 이로써 할미성은 백제에 있어서 진천지역의 철과 토기의 대단위 공급시설과 관련된 성으로서의 조심스런 판단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