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절대권력도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 존재한 유적들 또한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복원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파괴되어 그 잔재의 일부가 남아 후세에게 전한다.
우리나라의 전통건축이라는 대부분의 건축물들 중에서 축조 당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될까 ? 특히 동양의 건축물들은 목조건축의 특성상 화재에 취약하여 천 년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최근까지 잔존하는 천년고찰도 수많은 수난과 중창불사를 거쳐서 이어져 온 것이며, 시대에 따른 불교관의 변천으로 사찰의 배치는 물론이고, 부처님 뿐만 아니라 조형물까지도 그 해석을 달리하여 전해진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처음 본 통도사와 고등학교 때 다시 본 통도사와 대학에서 전통사찰 답사 때 또 다시 본 통도사는 그 모습의 변화보다는 통도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져 왔다. 그리고 전통건축에 대한 관심 때문일지는 몰라도 언제인가부터 통도사가 오합지졸의 난장터처럼 보이기 시작하여 96년 이후로는 더 이상 발길을 하지 않았다. 이는 통도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대부분의 사찰은 시대의 변화와 중창불사를 거쳐 전통사찰이라기 보다는 백화점식 박물관으로 변형되어가고 있다. 전통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을 포용하는 과정과 유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변화되어 왔지만, 오늘날에는 관광자원으로 상업화되면서 사찰체험시설과 불교대학과 성보박물관 등이 건립되어 전통사찰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대학시절에 법주사에서 수련회를 하면서 큰 스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불교건축은 왜 현대건축물로 변화하지 않습니까 ? 그리고, 철큰콘크리트 구조물로 지어진 사찰들은 왜 목조건축양식을 모방할까요." 하고 질문을 했더니, 그 때 큰 스님께서는 "절이나 불상이라는 것은 허상일 뿐이며, 부처님의 진리를 일깨우는데는 그 장소와 건물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종교건축에 상징성이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비록, 그것이 허상일지라도 그 허상이 표현하는 의미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경주 황룡사와 익산 미륵사지 등 폐사지의 복원문제가 불교계 뿐만 아니라, 지역관광자원의 인프라 구축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최근에 지어진 사찰들에서 불상의 개금과 초대형화 그리고, 기와와 목재와 채색 등 건축재료의 선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가 발생되고 있다. 어찌 보면은 전통재료와 양식만을 고집할 수 없는 현실에서 현대전통사찰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전통사찰이 지나치게 상업화로 변모해가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싶다. 고려말기의 불교와 조선말기의 유교가 왜 부패하고 권력과 민심으로부터 멀어져갔는지 되새겨볼 일이다.
충주 남산(금봉산) 자락의 직동(고든골)에는 창룡사와 석종사가 있다. 충주 창룡사는 조선조 말기에 충주읍성 내의 관청을 중창하기 위해 폐사되었으며, 이는 일제강점기에 충주읍성의 해체로 인하여 그 일부 자재가 다시 충주 대원사를 중창하는데에 쓰였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는 절이다. 이는 창룡사 뿐만 아니라, 한양의 궁궐과 한옥들도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어 그 자재들이 일본신사와 일본인들의 주택은 물론이고 한양의 개량한옥과 건물들의 자재로 쓰여졌다. 서울의 한옥촌이라는 북촌과 남촌에서 전통한옥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창룡사와 석종사가 중창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창룡사의 작은 암자와 석축 그리고 석종사 부근의 작은 탑이 흩어진 폐사지가 지금은 거대한 사찰로 변신하여 충주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어 있다. 하지만, 수안보의 미륵사지, 소태의 청룡사지, 동량의 개천사지(정토사지), 신니의 숭선사지, 노은의 보련사지 등 수많은 옛 절터는 그 유적만이 남아 있거나, 그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아쉬움을 남긴다.
석종사와 창룡사를 바라보면서 왜 창룡사와 석종사(죽장사지)는 발굴조사도 없이 중창되었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방치된 것처럼 보이는 창룡사 다층청석탑의 보존문제와 개조되어 변형된 죽장사 직동석탑(석종사 오층석탑)의 복원문제는 향토사학계나 문화재를 관리하는 관계기관에서 유물과 사료만을 중시하는 잘못된 행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한다. 창룡사 다층청석탑과 석종사 오층석탑은 문화재적 가치가 떨어지는 석조물로 그 의미가 중요 문화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유물과 폐사지에 대한 연혁과 유래는 창룡사외 석종사가 중창되는 과정에서 가장 소중한 전통의 맥을 이어주는 유산이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은 역사학계가 외면한 폐사지와 유물을 불교계가 스스로 사찰을 복원하고 유적을 보호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폐사지의 복원과 중창불사에서 폐사지와 유구에 대한 원형보존 문제는 되새겨 볼 일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창룡사 다층청석탑과 석종사 오층석탑의 모습을 사진으로 올리지 않은 것은 불필요한 논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찰을 중창하면서 옛 것들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법의 건축물과 조형물들을 만들어 현대전통건축의 또 다른 형태로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한 역사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전통문화를 계승한다는 것은 그 유물의 껍데기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통문화를 창출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지나간 역사를 왜곡하거나 유적을 훼손하기보다는 문화유산의 원형은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충주 창룡사 다층청석탑(디지털충주문화대전)
- [정의]충청북도 충주시 직동 창룡사에 있는 고려 전기 청석탑.
- [개설]
1870년경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창룡사 등을 헐어 불타 없어진 충주 관아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1984년 충주 관아 건물을 중수할 때 명문 기와를 통하여 확인되기도 했다. 창룡사 다층 청석탑은 앞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창룡사의 연혁이 오래되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 [건립경위]
창룡사 다층 청석탑의 경우도 원위치를 알 수 없어 구체적인 용도와 기능은 알 수 없지만, 규모가 작고 장식성이 높은 것으로 보아 중요 신앙의 대상이기보다는 특별한 목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충주시 용탄동 폐사지에서도 창룡사 청석탑과 유사한 청석으로 제작된 옥개석이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 [위치]
- [형태]
현재는 화강암으로 치석된 평면 사각형의 석재가 마련되어 있다. 화강암 석재 위에는 단판의 연화문이 장식된 연화대석이 올려져 있는데, 일반적인 청석탑 양식으로 보아 이 부재는 기단부의 갑석이나 받침대로 활용되었던 부재로 보인다. 연화문이 장식된 부재가 올려져 있는데, 합각부의 치석 수법과 낙수면의 처리 등으로 보아 옥개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청석탑은 전체적으로 7개의 옥개석이 현재 남아 있다. 옥개석은 파손이 많이 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평박하게 치석하였으며, 낙수면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 처마 쪽으로 내려오도록 했다. 또한 표면을 정교하게 다듬어 깔끔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고려시대 전형적인 청석탑 양식으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 [현황]
- [의의와 평가]
창룡사에 남아 있는 다층 청석탑은 창룡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창룡사의 연혁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이다. 또한 정교한 연화문 조식 수법과 옥개석의 유려한 낙수면 치석 수법은 공예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고려시대 전형적인 청석탑 양식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으며, 현재 충주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청석탑이다.
[참고문헌] |
• 『충주시지』(충주시, 2001) |
충주 직동 석탑(디지털충주문화대전)- [정의]충청북도 충주시 직동 석종사에 있는 고려 전기 석탑.
- [개설]
- [건립경위]
- [위치]
- [형태]
면석부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를 모각했는데, 탱주는 3주를 세워 상당히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수법은 고려시대 건립된 석탑들 중에 주로 왕실발원에 의하여 원찰로 건립된 개경 일대의 일부 석탑에서 볼 수 있다. 우주와 탱주 사이에는 안상을 새겼는데, 그 안에 좌우로 펼쳐지는 화형 문양을 장식하였다. 이러한 안상 조식 수법도 고려시대 일반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하대갑석 상면에는 낮은 괴임을 마련하여 상층기단을 받치도록 했다. 상층기단은 면석부에 일반적인 우주와 탱주를 세워 각 면을 분리하였다. 우주와 탱주의 모각 높이가 낮아 다소 형식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상대갑석은 하부에 부연을 마련하였는데, 각형(角形)이 아닌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도록 한 내곡형(內曲形)을 이루고 있다.
상대갑석 상면에는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이러한 상대갑석의 치석과 장식 수법은 고려 전기에 건립된 석탑들에서 많이 적용된 기법이었다. 탑신부는 일부 탑신석과 옥개석만 원래의 부재는 나머지 부재들을 새롭게 추가되었다. 현재 1층 탑신석, 2층과 3층 옥개석이 원래의 부재로 보인다. 1층 탑신석은 마련되었으며 좌우에 우주가 모각되었다. 우주는 좌우 너비가 좁고 모각된 정도도 약하여 다소 형식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은 하부에 각단의 높이가 동일한 4단의 옥개받침을 마련하였다. 낙수면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처마 쪽으로 내려오고 있어, 부드럽고 경쾌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한 합각부의 전각(轉角)을 높게 들어 올려 경쾌한 반전(反轉)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장식성을 높이고 있다. 옥개석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 [현황]
- [의의와 평가]
기단부의 안상 조식 수법, 상대갑석의 내곡된 부연의 표현과 연화문 장식, 옥개석의 경쾌한 치석 수법 등은 고려시대 건립된 석탑들 중에서도 상당히 우수한 석탑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충주 지역에 건립된 고려시대 석탑들 중에서는 가장 화려하고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는 석탑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충주시지』(충주시,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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