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건축문화/전통건축

한국의 고건축 - 도산서원과 초가삼칸

산골어부 2012. 2. 9. 23:07

 

전통건축의 온돌과 마루에 대하여 정리하다가 학창시절에 고건축물을 답사하던 곳 중에 도산서원의 도산서당이 생각이 나서 암서헌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겨본다. 

 

1985년도에 도산서원을 답사했을 때는 도산서당의 암서헌이란 마루의 중앙부에 일종의 통풍구로 마루널이 간격을 두고 틈이 있어 여름철에는 그 틈으로 통풍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서 다시금 자료들을 검토해 보니,  기억과는 달리 툇마루의 마루널이 통풍을 위하여 일정한 간격을 두고 깔려 있었다.  당시의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이지만, 도산서당의 툇마루는 특이한 마루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도산서당의 담장은 정우당 구간을 담을 쌓지않아 또 다른 공간미를 연출하고 있었다. 

 

 

 

 

한국의 건축사에서 도산서원은  대표적인 서원건축의 하나이다. 서원건축물은 사찰과 달리 옛성현들을 추모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곳이라 단순하면서도 엄숙하여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도산서원 내에 있는 도산서당은 고건축에서 공간구성이 잘 표현된 건물 중에 하나가 아닌가한다. 완락재와 암서헌으로 이루어진 도산서당은 초가삼칸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부엌 1칸, 방1칸, 마루1칸의 작은 서당이지만 방은 완락재로 마루는 암서헌으로 불리운다.  완락재의 방은 겨울의 공간, 암서헌의 마루는 여름의 공간, 그리고 옥외는 봄과 가을의 공간으로 구성되는데, 특히 암서헌의 툇마루는 본채에서 증축된 부분으로 바닥의 마루널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깔려 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전통건축재료 중에 대표적인 것이 나무와 흙과 돌이다. 그리고 전통건축재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후환경에 따른 적응인데, 한반도는 사계절에 따른 기후의 변화가 심한데다가, 겨울과 여름의 기온차와 장마철의 고온다습한 날씨를 극복하기 위하여 주거건축의  내,외부 공간에 형성된 것이 온돌과 마루이다.  마루문화는 중국과 일본 등 남방문화권에서 잘 발달되어 있지만, 한민족 온돌문화는 주거건축의 독특한 난방기법으로 발전하였다. 온돌문화는 오늘날에도 땔감이 나무에서 석탄,석유,전기 등으로 변천되었는데도 한민족 뿐만 아니라, 서양의 주거건축에서도 열효율과 쾌적성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한국의 온돌문화가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이는 전통가옥에서의 온돌구조가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온돌의 난방방식인 바닥난방법이 계승된 것으로 보는데, 이는 우리민족의 온돌

문화가 나무를  땔감으로 하기에 산림이 훼손되고, 구들과 굴뚝이라는 온돌구조가 현대주거문화에서 적용하기 어렵고 많은 사회문제와 환경문제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온돌문화처럼 전통문화의 계승은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전통문화 속에 숨어있는 삶의 지혜를 계승하는 것이 아닌가한다.

 

도산서당의 암서헌은 한칸짜리 마루이다. 한칸 밖에 되지않는 방과 마루에서 몇 명의 후학을 가르쳤을까 ?  그리고, 마루 동측에 덧붙인 툇마루는 여름철 마루널의 바닥통풍 때문인지 ?  아니면 마루가 협소하여 곡식이나 서책을 말리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전통건축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이다. 또한 도산서당 앞의 작은 연못(정우당)과  연못을 둘러친 담장이 외부공간을 끌어들이기 위해 트여 있어 마루에서 보이는 외부공간이 담너머의 공간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공간을 외부와 연계시켜 작은 연못에서도 또 다른 공간미를 느끼게 한다. 현재의 도산서원은 도산서당을 더욱 작고 초라한 세칸짜리 별채로 느끼게 하지만, 퇴계 이황선생이 처음 도산서당을 지었을 때의 모습은 완락과 암서를 표현하고자한 건축물로 볼 수있다.

  

도산서원에서 도산서당인 완락재(玩樂齋)는 "완상을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는 뜻이고, 암서헌(巖栖軒)은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서 바위에 깃들어 조그마한 효험을 바란다."는 겸손한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도산서원의 연혁을 살펴보면 퇴계 이황은 이 작은 도산서당을 짓는 것조차 힘들어서 이를 완성하는데, 수 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초가삼칸인 서민가옥의 초가집에서는 대청마루나 지붕의 기와는 엄두도 내질 못할 것이지만, 당대 최고의 유학자의 서당이라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도산서당이다. 그 작은 공간이 연출한 건축물의 내.외부 공간 구성은 선비의 청렴과 겸양을 일깨워 주는 듯했었다. 충북 괴산 화양계곡에도 우암 송시열의 암서재란 곳이 있다.  도산서원의 암서헌과 화양서원의 암서재는 무엇이 다를까 ?  도산서원의 암서헌이 후학양성과 학문에 정진했다면, 화양동의 암서재는 후학양성보다는 유림들이 모여들어 야합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암서재의 건물과 주변의 암석에 새겨진 글귀에서 나타난다. 보는 시각에 따라 명승지의 암벽에 새겨진 글자들이 문화유산으로 비춰질지는 몰라도 암서에 대한 선비들의 잘못된 인식이 아닐까한다. 그리고, 안동 하회마을 강변에 있는 옥연정사나 겸양정사도 도산서당의 완락재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서원에 딸린 가옥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부와 권세를 누리는 특권과 권위를 과시하는 특별한 가옥일 뿐이라는 것이다.

 

1985년도에 도산서원을 답사했을 때 함께 했던 교수님께서는 도산서원의 도산서당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했지만, 왜 이제서야 교수님의 생각에 공감을 하는 것인지 ~~~. 고건축물을 답사하면서 가장 가기 싫은 곳이 서원과 향교다.  서원건축이라는 것이 조선조의 유교건축물인데다가 너무나도 획일적인 형태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산서원도 학창시절에  답사하고는 지금까지 관람이 아닌 답사를 가본 적이 없었는데, 이를 계기로 다시 돌아보고픈 생각이 든다.

 

 

퇴계선생문집 제3권시(詩)

도산잡영(陶山雜詠) 병기(幷記)

영지산(靈芝山) 한 줄기가 동쪽으로 나와 도산(陶山)이 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산이 두 번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산이라 이름하였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옛날 이 산중에 질그릇을 굽던 곳이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따라 도산이라 한다.” 하였다.
이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으며 그 골짜기가 넓고 형세가 뛰어나며 치우침이 없이 높이 솟아, 사방의 산봉우리와 계곡들이 모두 손잡고 절하면서 이 산을 빙 둘러싼 것 같다.
왼쪽에 있는 산을 동취병(東翠屛)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것을 서취병(西翠屛)이라 한다. 동취병은 청량산(淸凉山)에서 나와 이 산 동쪽에 이르러서 벌려 선 품이 아련히 트였고, 서취병은 영지산에서 나와 이 산 서쪽에 이르러 봉우리들이 우뚝우뚝 높이 솟았다.
동취병과 서취병이 마주 바라보면서 남쪽으로 구불구불 휘감아 8, 9리쯤 내려가다가, 동쪽에서 온 것은 서쪽으로 들고 서쪽에서 온 것은 동쪽으로 들어 남쪽의 넓고 넓은 들판 아득한 밖에서 합세하였다.
산 뒤에 있는 물을 퇴계라 하고, 산 남쪽에 있는 것을 낙천(洛川)이라 한다. 퇴계는 산 북쪽을 돌아 산 동쪽에서 낙천으로 들고, 낙천은 동취병에서 나와 서쪽으로 산기슭 아래에 이르러 넓어지고 깊어진다.
여기서 몇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물이 깊어 배가 다닐 만한데, 금 같은 모래와 옥 같은 조약돌이 맑게 빛나며 검푸르고 차디차다. 여기가 이른바 탁영담(濯纓潭)이다.
서쪽으로 서취병의 벼랑을 지나서 그 아래의 물까지 합하고, 남쪽으로 큰 들을 지나 부용봉(芙蓉峰) 밑으로 들어가는데, 그 봉이 바로 서취병이 동취병으로 와서 합세한 곳이다.
처음에 내가 퇴계 위에 자리를 잡고 시내를 굽어 두어 칸 집을 얽어서 책을 간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으려 하였는데, 벌써 세 번이나 그 자리를 옮겼으나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가슴을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고 산 남쪽에 땅을 얻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골이 있는데, 앞으로는 강과 들이 내려다보이고 깊숙하고 아늑하면서도 멀리 트였으며, 산기슭과 바위들은 선명하며 돌 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서 참으로 수양할 곳으로 적당하였다.
어떤 농부가 그 안에 밭을 일구고 사는 것을 내가 값을 치르고 샀다. 거기에 집짓는 일을 법련(法蓮)이란 중이 맡았다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죽었으므로, 정일(淨一)이란 중이 그 일을 계승하였다.
정사년(1557, 명종12)에서 신유년(1561, 명종16)까지 5년 만에 당(堂)과 사(舍) 두 채가 그런대로 이루어져 거처할 만하였다.
당은 모두 세 칸인데, 중간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으니, 그것은 주 선생(朱先生)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동쪽 한 칸은 암서헌(巖棲軒)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운곡(雲谷)의 시에,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했으니 바위에 깃들여 작은 효험 바라노라.”라는 말을 따온 것이다. 그리고 합해서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사는 모두 여덟 칸이니, 시습재(時習齋)ㆍ지숙료(止宿寮)ㆍ관란헌(觀瀾軒)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합해서 농운정사(隴雲精舍)라고 현판을 달았다.
서당 동쪽 구석에 조그만 못을 파고 거기에 연(蓮)을 심어 정우당(淨友塘)이라 하고, 또 그 동쪽에 몽천(蒙泉)이란 샘을 만들고, 샘 위의 산기슭을 파서 암서헌과 마주 보도록 평평하게 단을 쌓고는, 그 위에 매화ㆍ대[竹]ㆍ소나무ㆍ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 불렀다.
당 앞 출입하는 곳을 막아서 사립문을 만들고 이름을 유정문(幽貞門)이라 하였는데, 문밖의 오솔길은 시내를 따라 내려가 동구에 이르면 양쪽 산기슭이 마주하고 있다. 그 동쪽 기슭 옆에 바위를 부수고 터를 닦으니 조그만 정자를 지을 만한데, 힘이 모자라서 만들지 못하고 다만 그 자리만 남겨 두었다. 마치 산문(山門)과 같아 이름을 곡구암(谷口巖)이라 하였다.
여기서 동으로 몇 걸음 나가면 산기슭이 끊어지고 바로 탁영담에 이르는데, 그 위에 커다란 바위가 마치 깎아 세운 듯 서서 여러 층으로 포개진 것이 10여 길은 될 것이다. 그 위를 쌓아 대(臺)를 만들었더니, 우거진 소나무는 해를 가리며, 위에는 하늘 아래에는 물이어서 새는 날고 고기는 뛰며 물에 비친 좌우 취병산의 그림자가 흔들거려 강산의 훌륭한 경치를 한눈에 다 볼 수 있으니, 이름을 천연대(天淵臺)라 하였다.
그 서쪽 기슭 역시 이것을 본떠서 대를 쌓고 이름을 천광운영(天光雲影)이라 하였으니, 그 훌륭한 경치는 천연대에 못지않다.
반타석(盤陀石)은 탁영담 가운데 있다. 그 모양이 넓적하여 배를 매 두고 술잔을 돌릴 만하며, 큰 홍수를 만날 때면 물속에 들어갔다가 물이 빠지고 물결이 맑아진 뒤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나는 늘 고질병을 달고 다녀 괴로웠기 때문에, 비록 산에서 살더라도 마음껏 책을 읽지 못한다. 남몰래 걱정하다가 조식(調息)한 뒤 때로 몸이 가뿐하고 마음이 상쾌하여,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다 감개(感槪)가 생기면, 책을 덮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 관란헌에 임해 정우당을 구경하기도 하고 단에 올라 절우사를 찾기도 하며, 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치며 꽃을 따기도 한다.
혹은 바위에 앉아 샘물 구경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거나 낚시터에서 고기를 구경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가까이하면서 마음대로 이리저리 노닐다가, 좋은 경치 만나면 흥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 안에 쌓인 책이 가득하다.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삼가 마음을 잡고 이치를 궁구할 때, 간간이 마음에 얻는 것이 있으면 흐뭇하여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 생각하다가 통하지 못한 것이 있을 때는 좋은 벗을 찾아 물어보며, 그래도 알지 못할 때는 혼자서 분발해 보지만 억지로 통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우선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가끔 다시 그 문제를 끄집어내어 마음에 어떤 사념도 없애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스스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그렇게 하고 내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또 산새가 울고 초목이 무성하며 바람과 서리가 차갑고 눈과 달빛이 어리는 등 사철의 경치가 다 다르니 흥취 또한 끝이 없다. 그래서 너무 춥거나 덥거나 큰바람이 불거나 큰비가 올 때가 아니면, 어느 날이나 어느 때나 나가지 않는 날이 없고 나갈 때나 돌아올 때나 이와 같이 하였다.
이것은 곧 한가히 지내면서 병을 조섭하기 위한 쓸모없는 일이라서 비록 옛사람의 문정(門庭)을 엿보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마음속에 즐거움을 얻음이 얕지 않으니, 아무리 말이 없고자 하나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이에 이르는 곳마다 칠언시 한 수로 그 일을 적어 보았더니, 모두 18절(絶)이 되었다.
또 몽천(蒙泉), 열정(洌井), 정초(庭草), 간류(澗柳), 채포(菜圃), 화체(花砌), 서록(西麓), 남반(南沜), 취미(翠微), 요랑(廖朗), 조기(釣磯), 월정(月艇), 학정(鶴汀), 구저(鷗渚), 어량(魚梁), 어촌(漁村), 연림(烟林), 설경(雪徑), 역천(櫟遷), 칠원(漆園), 강사(江寺), 관정(官亭), 장교(長郊), 원수(遠岫), 토성(土城), 교동(校洞) 등 오언(五言)으로 사물이나 계절 따라 잡다하게 읊은 시 26수가 있으니, 이것은 앞의 시에서 다하지 못한 뜻을 말한 것이다.
아, 나는 불행히도 뒤늦게 구석진 나라에서 태어나서 투박하고 고루하여 들은 것이 없으면서도 산림(山林)에 즐거움이 있다는 것은 일찍 알았었다. 그러나 중년(中年)에 들어 망녕되이 세상길에 나아가 바람과 티끌이 뒤엎는 속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돌아오지도 못하고 거의 죽을 뻔하였다.
그 뒤에 나이는 더욱 들고 병은 더욱 깊어지며 처세는 더욱 곤란하여 지고 보니, 세상이 나를 버리지 않더라도 내 스스로가 세상에서 버려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비로소 굴레에서 벗어나 전원(田園)에 몸을 던지니, 앞에서 말한 산림의 즐거움이 뜻밖에 내 앞으로 닥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오랜 병을 고치고 깊은 시름을 풀면서 늘그막을 편히 보낼 곳을 여기 말고 또 어디를 가서 구할 것인가.
그러나 옛날 산림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거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현허(玄虛)를 사모하여 고상(高尙)을 일삼아 즐기는 사람이요, 둘째는 도의(道義)를 즐기어 심성(心性) 기르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전자의 주장에 의하면, 몸을 더럽힐까 두려워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심한 경우 새나 짐승과 같이 살면서 그것을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후자의 주장에 의하면, 즐기는 것이 조박(糟粕)뿐이어서 전할 수 없는 묘한 이치에 이르러서는 구할수록 더욱 얻지 못하게 되니, 즐거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차라리 후자를 위하여 힘쓸지언정 전자를 위하여 스스로 속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니, 어느 여가에 이른바 세속의 명리(名利)를 좇는 것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지 알겠는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옛날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명산(名山)을 얻어 의탁하였거늘, 그대는 왜 청량산에 살지 않고 여기 사는가?”
하여, 답하기를,
“청량산은 만 길이나 높이 솟아서 까마득하게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에 늙고 병든 사람이 편안히 살 곳이 못 된다. 또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려면 어느 하나가 없어도 안 되는데, 지금 낙천(洛川)이 청량산을 지나기는 하지만 산에서는 그 물이 보이지 않는다. 나도 청량산에서 살기를 진실로 원한다. 그런데도 그 산을 뒤로 하고 이곳을 우선으로 하는 것은, 여기는 산과 물을 겸하고 또 늙고 병든 이에게 편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옛사람들은 즐거움을 마음에서 얻고 바깥 물건에서 빌리지 않는다. 대개 안연(顔淵)의 누항(陋巷)과 원헌(原憲)의 옹유(甕牖)에 무슨 산과 물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바깥 물건에 기대가 있으면 그것은 다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리라.”
하여, 나는 또,
“그렇지 않다. 안연이나 원헌이 처신한 것은 다만 그 형편이 그런 상황에서도 이를 편안해한 것을 우리가 귀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이런 경지를 만났더라면 그 즐거워함이 어찌 우리들보다 깊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공자나 맹자도 일찍이 산수를 자주 일컬으면서 깊이 인식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대 말대로 한다면, ‘점(點)을 허여한다.’는 탄식이 왜 하필 기수(沂水) 가에서 나왔으며 ‘해를 마치겠다.’는 바람을 왜 하필 노봉(蘆峰) 꼭대기에서 읊조렸겠는가.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자, 그 사람은 그렇겠다 하고 물러갔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16) 동지에 노병기인(老病畸人)은 적는다.

 

정우당(淨友塘)

 


물건마다 한 하늘의 묘한 이치 품었거늘 / 物物皆含妙一天
염계는 무슨 일로 그대만을 사랑했나 / 濂溪何事獨君憐
향그런 덕 생각하니 벗하기 어려운데 / 細思馨德眞難友
정(淨) 하나로 일컫는 것 편벽될까 두려워라 / 一淨稱呼恐亦偏

 

반타석(盤陀石)

 


도도한 탁류 속에 얼굴 문득 숨겼다가 / 黃濁滔滔便隱形
고요히 흐를 때면 비로소 나타나네 / 安流帖帖始分明
어여쁘다 이 같은 거센 물결 속에서도 / 可憐如許奔衝裏
천고에 반타석은 구르거나 기울지도 않았네 / 千古盤陀不轉傾

[주D-001]운곡(雲谷) :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주D-002]농운정사(隴雲精舍) : 양(梁)나라 은사(隱士) 도홍경(陶弘景)의 시에, “산중에 무엇이 있는가. 언덕 위에 흰 구름이 많다. 다만 내 스스로 기뻐할 뿐, 이것을 가져다가 임에게 줄 수는 없네.[山中何所有, 隴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 하였다. 퇴계가 이 뜻을 취하여 정사(精舍)의 이름을 농운(隴雲)이라고 하였다.
[주D-003]천연대(天淵臺) : 《시경(詩經)》 〈한록(旱麓)〉에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구절에서 온 말인데,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는 그것을, “위아래에서 활발히 유행(流行)하는 천지의 조화(造化)를 살필 수 있다.” 하였다.
[주D-004]천광운영(天光雲影) : 주희의 시에, “반이랑 네모난 연못이 한 거울을 이루었으니,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半畒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5]조식(調息) : 주희(朱熹)가 지은 〈조식잠(調息箴)〉이 있는데, 이것은 호흡법(呼吸法)을 말한 것이다.
[주D-006]조박(糟粕) : 제 환공(齊桓公)이 당상(堂上)에서 글을 읽는데 수레바퀴를 만들던 대목이, “임금님이 읽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환공은 답하기를, “옛날 성인(聖人)의 글이다.” 하니, 대목은, “그러면 그것은 성인의 찌꺼기[糟粕]입니다.” 하였다. 환공이 물은즉 대목이 답하기를, “신(臣)은 수레바퀴 만드는 기술로 한평생을 살아오는데, 연장이나 법도는 자식에게 전하여 줄 수 있으나, 연장을 천천히 놀리고 더디게 놀리는 묘한 솜씨는 자식에게 전할 수 없습니다. 옛날 성인은 글은 남기었으나, 그 묘한 뜻은 전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글은 찌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였다. 《莊子 天道》
[주D-007]안연(顔淵)의 …… 옹유(甕牖) : 공자의 제자 안연은 누추한 골목[陋巷]에서 가난하게 살았고, 원헌(原憲)은 오막살이집에 깨어진 독으로 들창을 삼았다.
[주D-008]점(點)을 …… 나왔으며 :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각각 뜻한 바를 말하라.” 하였더니, 최후에 증점(曾點)이 모춘(暮春)에 춘복(春服)이 이루어지거든 관자(冠者) 5, 6명과 동자(童子) 6, 7명과 더불어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읊으며 돌아오리다.” 하니, 공자는 감탄하여, “나는 점(點)을 허여하노라.” 하였다. 《論語 先進》
[주D-009]해를 마치겠다 : 주희의 〈운곡십이영(雲谷十二詠)〉중의 한 구절이다.
[주D-010]물건마다 …… 품었거늘 :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만물(萬物)이 각각 한 태극(太極)을 갖추었다.” 하였다.

 

 

 

 

참고자료 -  (도산서원 전경)

 

 

참고자료 - (도산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