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모든 것을 다 기록하진 않는다. "
승정원일기나 임오일기에 나타난 중궁전인 명성황후의 피난기록은 피난경로와 피난과정 동안 겪은 투병에 관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명성황후는 궁궐에서 나오면서 부터 인후통(몸살감기 또는 학질)으로 고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명성황후의 피난지로 알려진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의 기록에서는 유학 이시일과 그 곳을 찾아온 친척들이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승정원일기에는 명성황후의 피난지가 노은이 아닌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 시골집(장호원 매산)으로만 기술되어있다. 명성황후의 유허지에 퍼져있는 민담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나 유물은 아주 미미하다. 하지만, 작은 산골동네에 국모인 명성황후가 다녀간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국역)승정원일기에서 발췌
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8)
○ 광서 8년 임오 6월 10일(갑자) 비.
중궁전이 사어(司禦) 윤태준(尹泰駿)의 집에 몰래 나아갔다. 배종(陪從)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閔應植), 진사 민긍식(閔肯植), 사어 윤태준이었다.
○ 광서 8년 임오 6월 11일(을축) 흐렸다 맑았다 함.
중궁전이 사어 윤태준의 집에 그대로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閔應植), 진사 민긍식(閔肯植), 사어 윤태준이었다.
○ 광서 8년 임오 6월 12일(병인) 맑음.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閔應植)의 서울집으로 옮겨 갔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閔肯植)이었다.
○ 광서 8년 임오 6월 13일(정묘) 맑음.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의 서울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이었다.
○ 광서 8년 임오 6월 14일(무진) 맑음.
중궁전이 임천 군수(林川郡守) 이근영(李根永)의 광주(廣州) 집으로 옮겨 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이었다.
○ 광서 8년 임오 6월 15일(기사) 맑음.
중궁전이 이조 판서 민영위(閔泳緯)의 여주 시골집으로 옮겨 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이었다.
○ 광서 8년 임오 6월 16일(경오) 맑음.
중궁전이 이조 판서 민영위의 여주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이었다.
○ 광서 8년 임오 6월 17일(신미) 맑음.
중궁전이 이조 판서 민영위의 여주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이었다.
○ 광서 8년 임오 6월 18일(임신) 맑음.
중궁전이 이조 판서 민영위의 여주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이었다.
○ 광서 8년 임오 6월 19일(계유) 비.
중궁전이 이조 판서 민영위의 여주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이었다.
○ 광서 8년 임오 6월 20일(갑술) 비.
중궁전이 이조 판서 민영위의 여주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이었다.
○ 광서 8년 임오 6월 21일(을해) 비.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長湖院)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이었고 오위장 민영기(閔泳驥)도 배종하였다.
○ 광서 8년 임오 6월 22일(병자) 맑음.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 오위장 민영기(閔泳驥)였다.
○ 광서 8년 임오 6월 23일(정축) 맑음.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 오위장 민영기였다.
○ 광서 8년 임오 6월 24일(무인).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 오위장 민영기였다.
○ 광서 8년 임오 6월 25일(기묘) 비.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 오위장 민영기였다.
○ 광서 8년 임오 6월 26일(경진) 낮에는 비 오고 밤에는 맑음.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 오위장 민영기였다.
○ 광서 8년 임오 6월 27일(신사) 맑음.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 오위장 민영기였다.
○ 광서 8년 임오 6월 28일(임오) 맑음.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 오위장 민영기였다.
○ 광서 8년 임오 6월 29일(계미) 맑음.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 오위장 민영기였다.
○ 광서 8년 임오 6월 30일(갑신) 맑음.
중궁전이 익찬 민응식의 충주 장호원 시골집에 그대로 나아가 있었다. 배종한 사람은 익찬 민응식, 진사 민긍식, 오위장 민영기였다.
○광서 8년 임오 7월 25일(기유) 맑음
전교하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의식 절차를 예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때 영의정이 나아가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때 제학 김병시(金炳始), 검교직제학 정범조(鄭範朝), 우승지 윤상만(尹相萬), 우부승지 김학수(金學洙)와 한림, 주서, 병조ㆍ도총부의 당상ㆍ낭청 각 1원이 배종(陪從)하라.”
하였다.
봉상시 정 서상조(徐相祖)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난 6월에 있었던 군사들의 반란은 천고의 큰 변고였습니다. 중궁 전하께서 서둘러 화를 피하실 적에 시위하는 반열에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나아가신 곳을 살피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은 황공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근래 듣자니, 매우 다행스럽게도 중궁 전하께서 조용히 변란에 대처하시어 누추한 곳에 은신해 계신다 하니, 삼가 바라건대, 머물고 계신 곳을 널리 수소문하여 의장을 갖추고 예법에 따라 왕후의 자리로 맞아들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근일에 있었던 변고는 역사에 없었던 일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본래 확실한 근거가 없는 법이지만 지금 그대의 상소를 보고 소문이 까닭 없이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널리 찾아서 맞아들이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되겠다.”
하였다.
지종정경 이인응(李寅應)이 상소하여 운운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천도(天道)는 밝게 돌아가고 사람들의 마음은 가리울 수가 없다. 행운과 불행이 교차하는 시기에 슬픔과 기쁨도 서로 갈마든다.”
하였다.
전 지평 이최영(李㝡榮)이 상소하여 운운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를 보다가 윤리가 막히고 끊어졌다는 내용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상심이 되고 탄식이 나온다.”
하였다.
전 지평 송상순(宋祥淳)이 상소하여 운운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서상조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광서 8년 임오 7월 26일(경술) 맑음
이원중에게 전교하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신하들은 모두 하직 인사를 그만두고 나아가라.”
하였다.
이원중에게 전교하기를,
“약원 제조를 체차하고 전망 단자를 들이라.”
하였다.
내의원 제조의 전망 단자를 들이니, 민영목(閔泳穆)을 낙점하였다.
이원중에게 전교하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때 겸찰 총융사는 해영(該營)의 군병 60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시위하라.”
하였다.
이원중이 영접관의 말로 아뢰기를,
“상국의 대진(大陣) 가운데 총병(摠兵) 2원이 병대(兵隊) 100명을 거느리고 충주(忠州)로 미리 갔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또 아뢰기를,
“겸찰 총융사 김기석이 중궁전을 맞이할 일로 이제 바야흐로 나갈 것입니다. 띠고 있는 어영대장의 명소패와 좌변포도대장의 명소패, 대장패, 전령패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리고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은 총괄하여 살필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며 포도대장의 중임 또한 잠시도 비워서는 안 됩니다. 전에 이와 같은 때에는 다른 쪽 대장이 겸하여 살핀 예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어영대장은 금위대장이 겸하여 살피고 포도대장은 다른 쪽 대장이 겸하여 살피라. 패는 그대로 차고 갔다 오라.”
하였다.
또 총융청의 말로 아뢰기를,
“겸찰 총융사 김기석이 해청(該廳)의 군병 60명을 거느리고 중궁전을 맞이하러 나아갔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때 두 강을 건너는 때에는 주교(舟橋)를 그만두고 용주(龍舟)로 거행하라.”
하였다.
이원중이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때 병조ㆍ도총부의 당상ㆍ낭청 각 1원, 오위장 2원, 무신겸선전관 4원, 금군(禁軍) 40인, 전패 군병(前牌軍兵)ㆍ후패 군병(後牌軍兵) 400명으로 마련하고, 전어군(傳語軍)은 충청 감사ㆍ경기 감사를 차사원(差使員)으로 특별히 정하여 전하는 일을 점검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시위는 강나루에서부터 거행하고 전패 군병, 후패 군병은 그만두라. 전어군은 규례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이원중이 예조의 말로 아뢰기를,
“이번에 중궁전을 맞이하여 입궐할 때 왕세자께서 맞이하고 뵙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교외에서 맞이하고 뵙는 것으로 마련합니까? 궐문 밖에서 맞이하는 것으로 마련합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궐문 밖에서 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이원중에게 전교하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때 판종정경 이재원(李載元)ㆍ이재면(李載冕), 종정경 이재완(李載完)이 나아가라.”
하였다.
○광서 8년 7월 29일(계축) 맑음
또 병조의 말로 아뢰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때 도로 좌우와 어귀를 엄히 더 파수하도록 삼영(三營)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서 8년 임오7월 27일 (신해) 맑음
시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중궁전을 맞이할 때와 세자궁이 중궁전을 맞이할 때 본원에서는 응당 전 인원이 나아가 참여해야 하는데, 보덕 이주영(李冑榮)이 현재 경기 양주에 있어 인원을 갖출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체차하고 전망 단자를 들이라.”
하였다.
보덕의 전망 단자를 들이니, 홍승목(洪承穆)을 낙점하였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중궁전을 맞이할 때와 세자궁이 중궁전을 맞이할 때 본원에서는 응당 전 인원이 나아가 참여해야 하는데, 겸필선 박두양(朴斗陽)이 말미를 받아 지방에 있어 인원을 갖출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체차하고 전망 단자를 들이라.”
하였다.
겸필선의 전망 단자를 들이니, 이보영(李輔榮)을 낙점하였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방금 익위사(翊衛司)의 보고를 접하니, 이번에 중궁전을 맞이할 때 본사에서는 응당 전 인원이 배위(陪衛)해야 하는데, 좌사어(左司禦)와 좌위솔(左衛率)이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우익찬(右翊贊) 민응식(閔應植), 우부솔(右副率) 김양현(金亮鉉), 우세마(右洗馬) 민영덕(閔泳悳)이 모두 신병이 있어 인원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정원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변통하여 인원을 갖추어 배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아직 차임되지 않은 사어의 대임에 의빈 도사 이만익(李萬翼)을 제수하고 아직 차임되지 않은 위솔의 대임에 감찰 조원하(趙爰夏)를 제수하라.”
하였다.
병조가 우사어에 이만익을 단부하고, 좌위솔에 조원하를 단부하였는데, 제수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광서 8년 8월 1일(갑인)
중궁전을 봉영(奉迎)해 환궁(還宮)한 뒤에,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약방, 내각, 정원, 옥당, 백관, 봉조하가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훈련대장 임상준(任商準)이 주교 당상(舟橋堂上)으로서 오늘 중궁전을 봉영하여 강을 건널 때 나갈 것입니다. 차고 있는 명소(命召)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로 차고 다녀오라.”
하였다.
○광서 8년 8월 2일(을묘)
중궁전을 봉영한 다음날이었다.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내각, 정원, 옥당, 조정의 2품 이상, 봉조하가 구전으로 문안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진하(陳賀)하는 경사의 명칭은 ‘중궁전을 봉영한 뒤의 칭경(稱慶) 진하(陳賀)’라고 일컫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교에, ‘대신이 주달한 것이 이미 이러하니, 고유하고 반포하는 의절은 예조로 하여금 날을 잡아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고유하고 반포하고 진하하는 길일을 일관(日官) 한응익(韓應翼)에게 가리도록 하니, 이번 8월 7일이 길하다고 합니다. 이날로 정하여 행할지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날로 정하여 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중궁전을 봉영한 뒤의 칭경 진하’를 할 길일을 8월 7일로 잡은 일로 초기하였는데, 전교에 ‘이날로 정하여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같은 날 새벽에 먼저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사직(社稷), 경모궁(景慕宮)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손시(巽時)에 교문(敎文)을 반포하고 진하하되,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진하하는 전문(箋文) 및 방물(方物)과 물선(物膳), 세자궁에 진하하는 방물과 물선은 규례대로 봉진하도록 경외(京外)에 알리고, 전문의 머리말은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지어 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방물과 물선은 그만두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중궁전을 봉영한 뒤의 칭경 진하’ 때 왕세자가 전문(箋文), 치사(致詞), 표리(表裏)를 올리는 예를 행하는 절차를 규례대로 마련할지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규례대로 마련하라.”
하였다.
○광서 8년 8월 7일(경신)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 기로(耆老), 군민(軍民), 한량인(閑良人) 등에게 교서를 내렸다. 왕이 이르기를,
“천도(天道)가 도움을 주시어 국운이 크게 새로워지고 무성(婺星)이 상서(祥瑞)를 불러들여 중궁전이 대궐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열 줄의 윤음을 선포하여 팔방의 백성들에게 유시하노라.
나는 부족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어렵고 커다란 일을 계승하게 되어, 하늘과 조종(祖宗)이 부여해 준 것에 대해 항상 깊은 물가에 임한 듯한 두려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만큼 춥다느니 덥다느니 하는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에 비단 침석과 하얀 쌀밥인들 어찌 편하겠는가. 근심하며 노력을 경주하기에 겨를이 없이 하루에 만 가지 국무(國務)를 다루고, 끊임없는 근심 속에 지내 온 지 이제 19년이 되었다. 그 사이 어느덧 부부간의 의(義)를 맺어 일찍부터 대내를 맡아 보는 공을 지닌 현숙한 비(妃)를 두게 되었다. 중전은 봄 가을로 정성스럽게 제수(祭需)를 올림에 공경하고 근신하는 태도를 푼 적이 없었고 밤낮으로 사치스러움을 경계하면서 부지런하고 검소함을 우선으로 삼았다. 부부간에 금실이 좋아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기풍 및 교화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으며, 아들을 낳는 경사를 이루어 우리 왕가 백대의 본손과 지손을 드리우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6월에 천고에 없던 변이 갑자기 생겨나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 예의바른 풍속을 지닌 우리 동방에서 적떼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전에 없이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놀랍고 통탄스러움을 차마 말로 할 수가 없다. 실로 믿을 만한 것이라곤 신명(神明)의 보살핌 한 가지뿐이었는데, 시간은 어느덧 흘러갔으되 사람들의 심정은 위로할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중전은 당일 난을 당했을 때 일시적으로 적절하게 변란에 대처하는 방도를 깊이 진념하여 침착한 자태를 지녔으니 이는 《주역(周易)》의 ‘어려움을 범하지 않는다.’는 것과 부합되는 것이고, 자취를 남 몰래 안정시켰으니 그 의리는 공자(孔子)의 ‘더불어 권도(權道)를 행할 만하다.’는 말씀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신료들의 여러 가지 진언에 따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가 의심스러워했다가 하는 등 마음의 갈피를 못 잡다가 나중에 가서야 친척집에 머물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이루 다 측량할 수 있겠는가. 이에 여러 사람들의 바라고 향모하는 마음이 다 같은지라 맞이하여 돌아오는 것을 조금도 늦출 수 없어, 이달 1일에 중궁전을 봉영하여 대궐로 돌아오게 되었다. 겸손하고 제어하는 자태는 사가(私家)에 나가 머무르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드러나 중전의 덕이 더욱 빛나게 되었고 건강도 평소와 다름이 없으니 하늘의 아름다움이 더욱 두터워졌도다. 동조(東朝)께선 근심스런 마음을 풀고 흐뭇해하며 모두 기뻐하고 있으며, 춘궁(春宮)은 애모하던 마음을 펴게 되어 주변을 맴돌며 너울너울 춤을 추는구나. 위기가 반전되어 울음이 웃음으로 바뀌었으며, 좋은 운을 맞아 옛것이 새로워졌도다. 이미 묘궁(廟宮)에 공경히 아뢰었기에 조야(朝野)에 이 소식을 전하고 온 나라가 기뻐하는 뜻을 미루어 은혜를 널리 베푸노라. 백성들에게 면모를 일신(一新)할 방도를 깨우쳐 주노니, 구습(舊習)의 때를 씻어 버리도록 하라.
이달 7일 새벽 이전에 모반 대역, 모반, 자손구매조부모부모(子孫毆罵祖父母父母), 처첩모살부(妻妾謀殺夫), 노비모살주(奴婢謀殺主), 모고살인(謀故殺人), 염매고독(魘魅蠱毒) 등 국가의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자, 장오죄, 강도죄, 절도죄 외에 잡범 사죄(雜犯死罪) 이하 도류(徒流), 부처(付處), 안치(安置), 충군(充軍)된 자는 이미 유배지에 도착하였건 도착하지 않았건, 이미 발각되었건 발각되지 않았건, 이미 처결되었건 처결되지 않았건 따지지 말고 모두 용서하라. 감히 사면 교지가 반포되기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말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로 처벌할 것이다. 관직에 있는 자는 자급(資級)을 한 등급 올려 주고 자궁(資窮)이 된 자는 대신 가자하라.
아,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음에 온 나라가 기쁨을 함께하도다. 임금과 백성이 서로 의지함으로 인해 태산 반석에 기반을 공고히 하고, 우주가 길이 편안하매 백성들이 태평 성세의 생활 속에 깃들이게 되는구나.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정범조가 지어 올렸다.
□시(□時).
상이 인정전에 나아갔다. 중궁전을 봉영한 데 대해 진하하는 자리에 입시할 때, 행 도승지 윤용구, 좌승지 윤상만, 우승지 조병직, 좌부승지 박영교, 우부승지 김학수, 동부승지 박종현, 사관 - 원문 빠짐 -, 제학 김병시ㆍ윤자덕, 검교직제학 조경호ㆍ정범조ㆍ김영수, 검교직각 이호익ㆍ윤용구ㆍ김흥균ㆍ조동희ㆍ민병석, 검교대교 홍순형ㆍ송병서, 대교 민영소가 차례로 시립하였다.
때가 되자, 통례가 무릎 꿇고 외판(外辦)을 계청하였다. 상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여(輿)를 타고 이극문(貳極門)을 나왔다. 약방 제조 민영목과 부제조 윤용구가 앞으로 나아가 문후하였다. 이어 인정문에 나아갔다. 통례가 여에서 내리기를 무릎 꿇고 계청하니, 상이 여에서 내려 좌(座)에 올랐다. 승지가 아뢰기를,
“종친과 문무 백관이 들어와야 합니다. 표신을 내어 작문(作門)을 열도록 하소서.”
하였다. 인의(引儀)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여 들어와 자리로 나아갔다. 찬의(贊儀)가 ‘국궁(鞠躬), 사배(四拜), 흥(興), 평신(平身)’을 창(唱)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찬의가 ‘궤(跪)’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무릎을 꿇었다. 승지가 전교(傳敎)하도록 무릎 꿇고 아뢰자, 선교관(宣敎官)이 교서를 선독(宣讀)하였다. 찬의가 ‘사배’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사배례를 행하였다. 찬의가 ‘궤 진홀 삼고두(跪搢笏三叩頭)’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무릎 꿇고 홀을 꽂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찬의가 ‘산호(山呼)’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한목소리로 ‘천세(千歲)’라고 하였다. 또 ‘산호’를 창하니, 또 한목소리로 ‘천세’라고 하였다. 또 ‘재산호(再山呼)’를 창하니, 또 한목소리로 ‘천천세(千千歲)’라고 하였다. 찬의가 ‘사배’를 창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모두 사배례를 행하였다. 통례가 무릎 꿇고 계청하여 예를 마쳤다. 상이 쓰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시위한 군병, 배위한 군병 들에게 각각 그 군영으로 하여금 건호궤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이 앞으로 나아가 문후하였다. 통례가 여를 타도록 무릎 꿇고 계청하자, 상이 여를 타고 인정문을 나가 이극문으로 들어갔다. 승지가 표신을 내도록 청하여 계엄을 풀었다. 상이 대내로 돌아가자,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승정원일기 - 이시일의 기록
http://blog.daum.net/topgwon2002/17182278
(참고자료)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의 피난 상황을 기록한 일기
기사입력 2011-05-29 오후 12:50:00 | 최종수정 2012-06-02 오후 12:50:56
6월 13일(맑음) 2경(二更, 오후9시~11시) 쯤, 중궁전하께서 벽동(碧洞, 서울 종로구 관훈동) 익찬 민응식(閔應植, 황후의 14촌) 집에 거둥하셨다. 인후증세로 박하유(薄荷油, 해열 진통완화제)를 드렸다.
6월 14일(맑음. 더움) 동틀 무렵에 민응식과 진사 민긍식(閔肯植, 민영위의 아들, 형식(炯植)으로 개명, 민응식의 4촌), 현흥택(玄興澤), 비자 1명이 배행하였다. 광주 취적리(吹笛里, 현재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 적취리의 오기인 듯.) 임천군수 이근영(李根永)의 집에서 점심을 드셨다. 조현(鳥峴,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 새오개) 점사에 있는 숙소에 이르셨다. 옥후가 조금 더 불편해지셨다가 4경(四更, 새벽 2시~4시) 후 조금 평순해 지셨다.
6월 15일(맑음. 더움) 새벽에 배행하였다. 이천읍(利川邑) 점사에 이르러 점심을 드셨다. 여주 단강(丹江, 현재 여주 남한강의 줄기인 여주읍 단현리 앞의 강을 부르는 옛이름) 권삼대(權三大)의 집 숙소에 이르셨다. 전 오위장 민영기(閔泳綺, 명성황후의 13촌)가 왔다.
6월 16일(맑음. 더움. 밤에 이슬비가 내렸다) 같은 마을 인근에 한점대(韓点大)의 집으로 옮기셨다. 환후는 차도가 없으셨다. 감길탕(甘桔湯, 인후통 효과) 두 첩과 박하탕에 용뇌(龍腦, 인후염 완화)를 타서 드셨다.
6월 17일(맑음. 더움. 소나기가 내렸다.) 계속 머무셨다. 감길탕 한 첩을 드렸고 박하탕에 용뇌를 타서 드셨다. 옥체의 다리에 종기가 나서 곪았다. 고약을 붙여 드렸다.
6월 18일(종일 비가 내렸다.) 계속 머무셨다. 환후는 달라지지 않으셨다. 오후에 인후증세가 있으셨고 종기가 저절로 터졌다. 감길탕 한 첩, 구갱(狗羹, 개고기 국) 한 사발, 부어고(鮒魚膏, 붕어를 고은 국물) 한 사발을 드렸다. 민긍식이 먼저 충주 노은(老隱,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신흥동)에 갔다.
6월 19일(아침에 비가 왔다. 오후에 잠시 개었다. 신시(申時, 오후 3시-5시) 후부터 비가 계속 내렸다) 새벽에 배행하였다. 충주 매산(梅山,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천주교 감곡성당 뒷산)에 이르러 오봉학(吳鳳鶴)의 집에서 점심을 드셨다. 사창 민응식의 향제(鄕第)를 숙소로 정하셨다.
6월 20일(비가 오다가 흐렸다가 했다) 계속 머무셨다. 대나무 통을 환처에 대고 약간의 붕사(硼砂, 방부, 소독작용.)를 불었다.
6월 21일(맑음. 더움) 동틀 무렵에 배행하였다. 노은(현재 충북 충주시 노은면 가신3리)에 있는 유학 이시일(李是鎰)의 집에 머무셨다. 감길탕 한 첩을 드렸고 박하탕에 용뇌를 타서 드셨다. 옥후가 점차 나아져 회복되셨다.
6월 22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고 판서 민승호(閔升鎬, 명성황후 양오빠)의 처 정경부인 이씨, 전 참판 민영익(閔泳翊, 민승호의 양자. 민태호 아들)의 처 정부인 김씨가 죽산(竹山,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서 왔다.
6월 23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6월 24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6월 25일(오후에 가랑비가 내렸다) 계속 머무셨다.
6월 26일(오후에 비가 왔다) 계속 머무셨다.
6월 27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6월 28일(맑음) 신시 이후에 배행하였다. 전 판서 민영위(閔泳緯, 명성황후 13촌)의 집이 있는 매산으로 옮기셨다.
6월 29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가미양위탕(加味養胃湯, 체증해소, 위장기능 보완) 두 첩을 드렸다.
6월 30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양위탕(養胃湯, 복통, 설사에 특효) 한 첩을 드렸다.
7월 1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청서육화탕(淸暑六和湯, 더위로 인한 구토, 설사에 효능) 한 첩을 드렸다.
7월 2일(맑음. 더움) 민영기가 배행하였다. 지평 섬실(蟾實,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에 있는 전 현감 안정옥(安鼎玉)의 집으로 옮기셨다. 민응식은 번잡한 이목을 꺼려하여 뒤에 출발하였고 여주읍에 이르러 머물러 묵었다.
7월 3일(보슬비가 내렸다. 밤에 비가 갑작스럽게 쏟아졌다) 계속 머무셨다. 청서육화탕 한 첩을 드렸다. 인후 증세가 다시 악화되셨다. 민응식이 도착했다.
7월 4일(새벽부터 비가 오더니 저녁에야 그쳤다) 계속 머무셨다. 양위탕 한 첩을 드렸다. 전 오위장 구연소(具然韶)를 충주 병영에 보냈다.
7월 5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인후증세가 점차 나아져 회복되셨다.
7월 6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양위탕 한 첩을 드렸다. 민영기를 양근 자잠리(紫岑里,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사룡리 자잠마을을 가리키는 듯)로 보냈다.
7월 7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 소화장애, 급성 위장염, 설사, 복통에 효과) 한 첩을 드렸다. 민긍식이 들어왔다.
7월 8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양위탕 한 첩을 드렸다. 민영기가 돌아왔다.
7월 9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옥체 다리의 종기가 완전히 아물었다.
7월 10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7월 11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민영기, 민응식이 다른 사람의 이목을 꺼려 먼저 떠났다.
7월 12일(맑음) 안정옥이 배행하였다. 매산 오봉학 집의 숙소로 돌아오셨다. 민긍식은 먼저 다른 길로 떠났다.
7월 13일(맑음) 민영위의 집 뒷 채로 옮기셨다.
7월 14일(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계속 머무셨다.
7월 15일(흐림. 비가 내렸다) 계속 머무셨다. 안정옥을 경성에 보냈다.
7월 16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우철(又哲)이 와서 경성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안정옥이 중도에 청나라 관리가 붙인 방문을 베껴서 돌아왔다. 김천 찰방 민치헌(閔致憲, 명성황후의 11촌)이 왔다.
※ 이 무렵 군란에 가담했던 군졸들과 백성들이 대원군납치에 항의하면서 왕십리와 이태원에서 청나라 군대의 무력에 대한 항쟁을 꾀하였다.
7월 17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민치헌을 경성에 보냈다. 이현식(李賢植)이 민영익의 봉서를 가지고 왔다.
7월 18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이현식이 돌아갔다. 안정옥을 경성에 보냈다.
7월 19일(비. 오후에 그쳤다) 계속 머무셨다. 점증(痁症, 학질)으로 옥후가 편치 않으셨다. 향사평위산(香砂平胃散, 학질증세에 효과) 두 첩을 드렸다.
7월 20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수삼 한 냥쭝(37.5g)을 드렸다.
7월 21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수삼 한 냥쭝을 드렸다. 학질증세가 나아지지 않으셨다.
7월 22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안신사물탕(安神四物湯, 사물안신탕. 스트레스, 신경과민에 효과) 두 첩을 드렸다. 민치헌과 안정옥이 경성에서 돌아왔다.
7월 23일(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계속 머무셨다. 수삼 한 냥쭝을 드렸다. 학질증세가 더 심해지셨다. 양성(陽城,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의인 박응종(朴應鍾)의 처소에 사람을 보냈다.
※ 임금이 어윤중을 원세개(袁世凱)에게 보내 왕비를 맞아들일 호위군의 차출을 요청하게 하였다.
7월 24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밤에 산삼 다섯 전쭝을 드렸다. 안정옥이 (황후께서 주신) 봉서를 가지고 경성으로 올라갔다.
7월 25일(맑음) 이른 아침에 산삼 다섯 전쭝을 드렸다. 민영위의 집 안채로 옮기셨다. 학질증세는 차도가 없으셨다. 양성 의인(醫人) 박응종이 왔다.
7월 26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이른 아침에 박응종이 진찰하러 들어왔다. 가미군자탕(加味君子湯, 설사, 중서, 기허에 효능) 두 첩을 드렸다. 좌찬성 민태호(閔台鎬, 황후의 12촌, 민영익의 생부) 집 하인이 봉서를 가지고 왔다. 같은 달 19일. 전 감찰 심의순(沈宜淳)이 환정곤위(還正壼位, 왕비의 지위를 바르게 되돌려 놓음)의 일로 제독 오장경에게 청원서를 냈고 며칠 안에 봉영하는 일이 있을 예정이어서 그런 까닭에 부사과 김설현(金卨鉉)이 이 일을 아뢰기 위해 경성으로부터 이른 아침에 도착하였다. 이현식이 왔다. 이날 밤 봉서와 무감 8명이 내려왔고 화복(華服)의 전교를 들으셨다.(임금의 명으로 환궁 때에 입을 왕비의 복색이 함께 온 듯)
7월 27일(맑음) 계속 머무셨다. 학질은 점점 증세가 약해지셨다. 가미군자탕 한 첩, 가감군자탕(加減君子湯, 신경쇠약, 두통에 효능) 한 첩을 드렸다. 봉영 때 배종할 관원이 내려왔다. 안정옥이 (임금께서 주신) 회답봉서를 가지고 내려왔다.
7월 28일(맑음) 아침에 가감군자탕 한 첩을 드렸다. 손시(巽時, 오전 8시 30분-9시 30분)에 가마를 움직여 죽산부 내아에 숙소를 정하셨다. 가감군자탕 한 첩을 드렸다.
7월 29일(맑음) 이른 아침에 가감군자탕 한 첩을 드렸다. 묘각(卯刻, 오전 5시-7시)에 가마를 움직여 양지현(陽智縣,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내아에 이르셨다. 주정(晝停, 낮에 행차가 멈춤)하셨다. 민영익이 왔다. 학질 증세가 남으셨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용인현(龍仁縣, 경기도 용인시) 동헌 숙소에 이르셨다. 평진탕(平陳湯, 체증과 학질에 효능) 한 첩을 드렸다.
8월 1일(맑음) 이른 아침에 가감군자탕을 한 첩 드렸다. 묘각에 가마를 움직여 신원(新院, 경기도 용인시 포곡읍 신원리)에 이르셨다. 어군막에서 주정하셨다. 신각(申刻, 오후 3시-5시)에 환궁하셨다.
출처 :가야산역사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 내포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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