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땅에 있는 신라의 산성.
최후의 승자는 ~~~~~
백제도 신라도
고려도 조선도 아닌
대한민국.
고려사지리지 충청도 공주목
공주(公州)
본래 백제의 웅천(熊川)으로 문주왕(文周王)이 한성(漢城)으로부터 이곳에 도읍을 옮겼고 성왕(聖王)에 이르러 또 도읍을 남부여(南扶餘)로 옮겼다가 신라(新羅)가 당(唐)과 더불어 협공하여 이를 멸망시키고 당(唐)이 웅진 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군사를 머물러 두어 지키게 하다가 당(唐) 나라 군사가 이미 물러가니 신라가 그 땅을 모두 거느리게 되었으며 신문왕(神文王)이 고쳐 웅천주(熊川州)로 삼아 도독(都督)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또 웅주(熊州)로 고쳤다. 태조(太祖)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갈아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매 공주(公州)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안절군(安節軍)이라 칭하고 하남도(河南道)에 소속하였다가 현종(顯宗) 3년에 절도사(節度使)를 폐하였다. 9년에 지주사(知州事)로 내렸고 충혜왕(忠惠王) 후2년에 원(元) 나라의 활활적평장(闊闊赤平章)의 아내 경화 옹주(敬和翁主)의 외향(外鄕)이므로 올려 목(牧)으로 삼았다. 계룡산(鷄龍山)【즉 신라의 서악(西岳)으로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과 웅진연소(熊津衍所)【상류는 금강(錦江)이 된다.】 가 있다. 별호(別號)를 회도(懷道)【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명종(明宗) 6년에 주(州)의 명학소(鳴鶴所) 사람 망이(亡伊)가 무리를 불러모아 공주(公州)를 쳐 함락시키자 조정에서 그 소(所)를 올려 충순현(忠順縣)으로 삼고 영위(令尉)를 두어 이를 무마하였다가 뒤에 내리니 다시 반란하였으므로 이에 이를 삭제하였다.】 라 한다. 4군(郡)과 8현(縣)이 속해있다.
○ 덕은군(德恩郡). 본래 백제의 덕근군(德近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덕은군(德殷郡)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견훤(甄萱)의 묘(墓)가 있다.
○ 회덕군(懷德郡). 본래 백제의 우술군(雨述郡)【후천(朽淺)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비풍군(比豊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계족산(鷄足山)이 있다.
○ 부여군(扶餘郡). 본래 백제의 소부리군(所夫里郡)【사비(泗)라고도 함.】 으로 백제 성왕(聖王)이 웅천(熊川)으로부터 와서 도읍하고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는데 의자왕(義慈王) 때에 이르러 신라가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당(唐)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唐) 나라 군사가 이미 떠나매 신라는 백제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고 문무왕(文武王) 12년에 총관(摠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는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천정대(天政臺)․조룡대(釣龍臺)․낙화암(落花巖)이 있다.
○ 연산군(連山郡). 본래 백제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고쳐 황산군(黃山郡)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았으며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개태사(開泰寺) 【태조(太祖)가 이미 백제를 평정하여 황산곡(黃山谷)에다 큰 절을 세우고 산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 이름을 개태(開泰)라 하였다.】 가 있다.
○ 시진현(市津縣). 본래 백제의 가지내현(加知柰縣)【가을내(加乙乃) 또는 신포(薪浦)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덕은군(德恩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다. 시진포(市津浦)가 있다.
○ 덕진현(德津縣). 본래 백제의 소비포현(所比浦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적오(赤烏)로 고쳐 비풍군(比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 진잠현(鎭岑縣). 본래 백제 진현현(眞峴縣)【진(眞)은 정(貞)으로도 씀.】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진령(鎭嶺)으로 고쳐 황산군(黃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유성현(儒城縣). 본래 백제의 노사지현(奴斯只縣)【사(斯)는 질(叱)로도 씀.】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비풍군(比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는 옛 이름 그대로 내속(來屬)하였다. 온천(溫泉)이 있다.
○ 석성현(石城縣). 본래 백제의 진악산현(珍惡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석산(石山)으로 고쳐 부여군(扶餘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이를 폐지하였다. 공민왕( 20년에 부여 감무(扶餘監務)로 와서 겸임하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에 다시 감무(監務)를 두었다.
○ 정산현(定山縣). 본래 백제의 열기현(悅己縣)【두릉윤성(豆陵尹城)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열성(悅城)으로 고쳐 부여군(扶餘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이산현(尼山縣). 본래 백제의 열야산현(熱也山縣)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웅주(熊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하였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 신풍현(新豊縣). 본래 백제의 벌음지현(伐音支縣)【무부현(武夫縣)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청음(淸音)으로 고쳐 웅주(熊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다시 지금 이름으로 갈아 내속(來屬)하였다.
세종지리지 충청도 / 공주목 / ◎ 회덕현(懷德縣)
○ 본래 백제의 우술군(雨述郡)인데, 신라에서 비풍군(比豐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회덕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1018년)에 공주(公州) 임내(任內-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있는 군, 현에 덧붙어 있는 지역으로 호장(戶長)이 통치)에 붙이었다가, 명종(明宗) 2년(117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고, 태종(太宗) 13년(14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 계족산(鷄足山)【현의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는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청주(淸州)에 이르기 14리, 서쪽으로 공주(公州)에 이르기 7리, 남쪽으로 진산(珍山)에 이르기 22리, 북쪽으로 문의(文義)에 이르기 24리이다.
○ 호수가 3백 호요, 인구가 1천 2백 66명이다.
○ 군정은 시위군(侍衛軍-중앙에 번(番)을 들러 올라오는 지방의 장정)이 7명이요,
수호군(守護軍-조선 초기 도절제사의 주둔지에 두었던 병종)이 4명이요,
선군(船軍-해군)이 1백 49명이다.
○ 토성(土姓-그 지방을 본관으로 하는 성)이 4이니, 황(黃), 임(任), 이(李), 방(房)이요, 망성(亡姓-옛 문적에는 있으나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이 1이니, 곽(郭)이요,
○ 정민역(貞民驛)의 속성(續姓)이 2이니, 배(裵), 김(金)이다.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2천 6백 88결이요,【논이 5분의 2가 된다.】
○ 토의(土宜-토산물)는 오곡과 모과[목과(木瓜-모과나무의 열매)]이다.
○ 토공(土貢-공물로 바치는 토산물)은 五倍子、土産石鐵느타리[진이(眞茸-참버섯의 북한어)],
싸리버섯[조족이(鳥足茸-싸리버섯)], 옻[칠(漆-옻칠)], 잡깃[잡우(雜羽-여러 가지 잡다한 날짐승)],
밀[황랍(黃蠟-벌집을 만들기 위하여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 대추, 여우가죽, 삵괭이가죽,
잘[산달피(山獺皮-검은담비의 털가죽)], 지초(芝草-버섯의 한 종류. 영지(靈芝)버섯), 종이요,
○ 약재(藥材)는 오배자(五倍子-붉나무에 생긴 혹 모양의 벌레집)이요,
○ 토산(土産)은 석철(石鐵-니켈, 철의 합금, 규산염 광물을 고르게 함유한 철광석)이다.【현의 북쪽 20리 직동(稷洞)에서 나는데, 하품(下品)이다.】
○ 계족산 석성(鷄足山石城)【현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사면이 매우 험하며, 둘레가 3백 34보 2척이 되고, 안에 샘이 하나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향인(鄕人)이 이르기를, “하늘이 가물 때 이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 역(驛-공문을 지방에 전달, 외국 사신의 왕래, 벼슬아치의 여행과 부임 때 마필(馬匹)을 공급하던 곳)이 1이니, 정민(貞民)이다.【세속이 잘못 전민(田民)이라 한다.】
○ 이원진(利遠津)【속칭 형각진(荊角津)이라 하며, 나룻배가 있다.】
○ 봉화가 1곳이니, 계족산(鷄足山)이다.【동쪽으로 옥천(沃川) 환산(環山)에, 북쪽으로 문의(文義) 소산(所山)에 응한다.】
○ 월경처(越境處-고을의 경계가 고르지 아니하여, 어느 한 부분이 이쪽 고을로 깊숙이 들어오거나 저쪽 고을로 깊숙이 들어간 곳)는 유성(儒城)의 동촌(東村) 낭산리(郞山里)가 현의 남면(南面)에 들어와 있다.
【영인본】 5책 632면
【태백산사고본】
원 문
◎ 懷德縣: 本百濟雨述郡, 新羅改爲比豐郡, 高麗改爲懷德縣。 顯宗戊午, 屬公州任內。 明宗二年壬辰, 始置監務, 本朝因之。 太宗十三年癸巳, 例改爲縣監。 鷄足山。 【縣人以爲鎭】 四境, 東距淸州十四里, 西距公州七里, 南距珍山二十二里, 北距文義二十四里。 戶三百, 口一千二百六十六。 軍丁, 侍衛軍七、守護軍四、船軍一百四十九。 土姓四, 黃、任、李、房; 亡姓一, 郭。 貞民驛續姓二, 裵、金。 厥土肥塉相半, 墾田二千六百八十八結。 【水田五分之二】 土宜五穀, 木瓜。 土貢, 眞茸、鳥足茸、漆、雜羽、黃蠟、棗、狐皮、狸皮、山獺皮、芝草、紙。 藥材, 五倍子、土産石鐵。 【産縣北二十里稷洞, 下品。】鷄足山石城。 【在縣東十里, 四面險阻, 周回三百七十四步二尺。 內有泉一, 冬夏不渴。 鄕人云: “天旱, 此山鳴則必雨。”】 驛一, 貞民。 【俗訛田民】利遠津。 【俗號荊角津, 有渡船。】 烽火一處, 雞足山。 【東準沃川、環山, 北準文義、所山。】 越境處, 儒城東村郞山里, 越入縣南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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