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머무름 속에서

역사란 그늘 아래서/담론들

충주 미륵대원지의 공깃돌 바위

산골어부 2019. 6. 1. 00:39

 

 

 

온달장군의 공깃돌 바위와 보주탑

 

삼국사기 열전에는 오늘날의 하늘재인 계립현이 나온다. 온달장군이 고구려의 영토인 죽령에서 하늘재에 이르는 소백산맥 북쪽의 땅을 수복하고 돌아오겠다는 이야기다. 온달장군에 관한 전설이 단양의 온달산성과 충주의 미륵사지 공깃돌 바위에 전래되어 왔지만, 온달산성이나 공깃돌 바위에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가 왔다갔다는 흔적을 남기질 않아서인지 전설로 분류한다. 공깃돌 바위는 온달장군이 힘쎈 장수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전설을 고증한다는 것도 무모한 일이다. 뜬소문처럼 날아다니는 것이 민담이다. 몇다리만 건너면 진실은 없고 솔깃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변질된다. 하지만, 유적지의 전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주 미미한 실마리라도 사실로 믿고 싶어진다.

 

신라의 아달라왕이 계립령과 죽령을 개척한 이후 신라의 진흥왕은 계립령을 넘어 고구려 영토인 한강으로 진출했고, 온달장군은 그 땅을 회복하겠다고 남한강 일대를 누비며 싸운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은 고구려와 외교협상을 벌이다가 결렬되어 고구려를 탈출하는 기록도 있다. 이 사건에서 등장하는 이야기가 간없는 토끼 이야기다. 이 일화에서는 거북이와 용왕이 등장한다. 소재와 주제가 혼돈하는 민담의 세계는 끝이 없다. 온달이 쌓은 공깃돌과 용의 보주는 어떻게 다를까 ? 요즈음은 충주 미륵대원지의 공깃돌을 보주(寶珠)라 하고, 공깃돌 바위는 보주탑(寶珠塔)이라고 한다.

 

삼장법사의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갖고 노는 것이 여의봉이다. 여의봉은 요술방망이다. 전설의 고향에 자주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같다. 서유기에서 도깨비가 손오공으로 변신한 것은 아닐까 한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온통 도깨비라는 귀신의 세상이었다. 부처님 사리가 보주로 변하고, 보주가 여의보주로 변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미륵사상이 수신사상인 용신과 결합하면서 여의주는 용이 신통력을 발휘하는 지혜가 된다. 용신의 모습에서 여의주를 입에 물고 불을 토하기도 하고, 앞발로 불덩어리를 던지기도 한다. 도깨비와 용, 그리고 손오공은 같은 맥락이다. 여의주는 진리를 현혹하는 잡귀를 물리치는 도구로 사용된다. 하지만, 사리가 부처님의 분신이라면 여의주는 부처님의 진리를 보호하는 상징물이다. 공깃돌은 바위를 보호하는 부수적인 상징이지만, 바위보다는 공깃돌인 보주에 시선이 집중된다. 온달의 공깃돌보다는 보주가 더 흥미롭다는 것이다. 전설도 진실보다는 인간들의 심리에 따라 변한다.

 

충주 미륵대원지의 공깃돌과 공깃돌 바위가 보주와 보주탑으로 알려진 것도 근래에 생긴 세계사라는 절과 사지의 발굴조사로 사지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가람배치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주란 용어와 달리 보주탑이라는 명사가 생성된 것이 아닌가한다. 공깃돌 바위가 바보온달의 유래에서 사지의 중심을 상징하는 보주탑으로 변질된 것이다. 건축물에 사용된 보주는 지붕 용마루의 중앙에 설치되고, 탑 또는 불상의 최상부에 설치하기도 한다. 미륵사지 오층석탑의 최상부에 박힌 철심인 찰간(擦竿)은 피뢰침이 아니라 머리의 장식을 고정하기 위한 것이다. 보주는 오늘날의 피뢰침이 아니라, 건물과 탑 또는 불상을 보호하는 상징물이다.  따라서 보주란 것은 있으나, 보주탑이라는 명칭은 탑의 구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잘못 만들어진 신조어로 보인다.

 

불교의 변천과정에서 무덤이 변한 것이 탑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사리를 모신 탑이 사원의 중심이다. 불교가 전파되면서 불상이 생겨나고, 경전이 만들어지고, 종파에 따라 주존불을 모신 전각이 사찰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사리탑은 불상의 부속물로 밀려난다.  삼보라는 불.법.승 중에서 무엇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가람의 배치는 달라진다.  하지만 미륵대원지에서는 불상과 석등과 탑이 일직선으로 배치되고, 전각들이 비대칭으로 동측에 배치되어 전통사찰처럼 보이질 않는다. 미륵사지의 중심은 어디일까 ?  지형으로는 사지의 중심이 공깃돌 바위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미륵사지의 중심은 미륵당의 미륵불이다. 금강계단으로 유명한 통도사의 배치처럼 초기에는 금강계단이 중심이지만, 사찰의 영역이 확대되고, 시대가 변천하면서 그 중심이 금강계단보다는 새로운 전각들로 이동하여 혼란스럽다. 충주 미륵대원지의 영역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미륵당의 미륵불을 중심으로 하는 사지 구역과 세계사가 위치하는 요사채와 마을, 그리고 봉수대와 역원에 따른 원터이며, 그 영역을 더 확대하면 사지와 원터의 진입공간과 사지와 원터의 뒷편에 있는 삼층석탑과 불두상이 있는 지역까지 포함한다. 지금은 미륵당의 석실 복원공사로 작업장으로 쓰이는 지역도 미륵당의 석실 축조에 사용된 토사와 석재를 채취하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구역은 미륵사지가 건립되기 이전에 다른 사찰이나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발굴조사나 출토유물이 없기에 무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전 시대에 있었던 유적들이 사찰과 역원공사에 사용되어 사라진 것은 아닐까한다. 신라의 중원경이 있었던 충주지역에는 지역의 명성과 달리 삼국시대의 사지는 없고, 고려시대에 왕사나 국사를 배출한 큰폐사지들이 산재한다. 삼국시대의 사지로 분류할 수 없는 것은 신라시대의 사찰들이 고려시대의 사찰로 변신하여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의 전각들도 대부분 사라져서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전통사찰의 건물들은 조선시대나 오늘날에 복원 또는 중창된 것들이다.

 

미륵대원의 배치와 미륵당 석실

 

 

하늘재는 삼국사기에서 계립령 또는 계립현과 마목현으로 기록된다. 삼국유사에는 계립령과 미륵대원이라는 기록이 나타나며, 고려사절요에는 몽고침입기에 대원령과 대원사란 기록이 있다. 사지의 발굴조사에서는 미륵당이라는 명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하늘재 정상에는 대원령 산성이 있으며, 고려 왕건이 머물렸다는 어류성은 조령산성의 원조격인 산성으로 미륵사지에서  봉수대가 있는 탄항산 골짜기로 올라가면 어류성의 동암문이 나온다. 그리고 미륵사지 앞에 있는 월악산에는 거대한 덕주산성과 석문이 버티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와 홍건적 침입으로 안동으로 피신한 공민왕의 전설도 있다. 하지만, 미륵사지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는 무관하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대에 조성된 다른 사찰보다도 정형화되지 못한 투박하면서도 소박한 유적들만 남아 더 많은 상상력과 의구심을 자아낸다. 삼국시대의 건축술보다도 못한 유적지로 보인다. 돌을 쌓는 것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수많은 산성들을 쌓아 왔기에 미륵사지의 규모나 기술은 산간오지의 다랭이논의 석축보다 조금은 큰 정도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미륵사지에는 불상과 탑을  만들 수 있는 석공이 필요하지만, 석공의 기술도 숙련된 고급기술자는 아닌듯 싶다.

 

미륵대원지는 입지조건부터 상식에서 벗어난다. 깊은 산 속인 북향의 경사지에서 평지와 같은 좋은 부지를 확보할 수는 없었겠지만, 다른 산사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입지와 배치를 보여준다. 사지와 원터는 산기슭의 넓고 좋은 부지가 아니라 홍수가 쓸고 지나가면 폐허가 될 것같은 골짜기에 근접해 있다. 원터는 하늘재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사람과 말이 먹을 물과 숙소와 곳간 때문에  아늑한 곳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렇게 터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미륵사지의 미륵당은 계곡에 터를 잡아 물길을 바꾸면서 조성하였다. 부지를 만들기 위해 석축을 쌓아 물길을 돌리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미륵사지처럼 본당이 계곡에 위치한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다. 사지를 조성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일부에서는 석굴암처럼 미륵당 내부의 결로를 방지하기 위해서 물길 위에 축조했을 것이라고도 하고, 용신처럼 계곡물에서 용이 승천하는 것을 표현했다고도 하지만, 그 보다는 석축의 재료인 토사와 석재의 운반을 쉽게하기 위하여 물길을 돌리고 최대한 낮은 곳에 미륵불을 세우고 미륵당의 석축을 쌓은 것으로 추정하는게 더 타당할 것같다. 또 일부에서 석굴암과 비교하여 반축조석굴이라는 표현도 하지만, 석굴암의 축조방식과 기술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 익산의 미륵사지나 경주의 황룡사나 불국사와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미륵당의 석실과 미륵불은 소규모의 인력과 단순한 기술로 이루어졌기에 부지부터 법당에 이르기 까지 치밀하게 계획되고 추진된 것이 아니라, 길고 긴 노력과 집념일 것이다.

 

미륵대원지에는 두 개의 공깃돌 바위가 있다. 윗공깃돌 바위는 오층석탑 옆에 있고, 아랫공기돌 바위는 당간지주 옆인 수로 건너편 숲 속에 있다. 아랫공기돌 바위 아래에는 옛물길의 흔적인 석축과 작은 물웅덩이가 아직도 잔존하고 있다. 미륵사지를 정비하면서 수로를 직선화하고, 주차장과 도로를 개설하고, 세계사를 건축하면서 본래의 물길을 변경한 것이다. 두 개의 공깃돌 바위는 미륵사지를 동서로 양분하는 기준점이 아닐까한다. 미륵불이 있는 미륵당이 물길 위에 배치됨으로써 변경된 물길을 따라 석축을 만들어 물길을 서측으로 최대한 이동했지만, 공기돌 바위 때문에 사지를 확장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사지는 수로를 따라 좁고 긴 형태로 조성된 것이다. 미륵당을 제외한 전각들의 배치는 사찰의 흥망에 따라 변천하기에 잔존하는 유물과 유구로 추정할 수 밖에는 없지만, 수로의 서측지역은 법당보다는 사찰의 부속건물들과 타용도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대원이란 표현도 큰 사찰이라기보다는 사찰 이외의 용도인 원터와 군사 또는 물자를 관리하는 창지 등이 있던 지역을 총괄한 명칭이거나 미륵사와 대원사가 합성되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지는 계립령이 개척된 시기부터 문경새재가 개척되어 영남대로의 육로가 바뀌는 시기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에 다양한 시설들이 축조되었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미륵사지에서 미륵불과 미륵당이 잔존한 것도 국가로 부터 보호를 받은 것이 아니라, 미륵사상의 법통을 계승하려는 불자와 지역민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걸어본 사람들은 문경새재와 하늘재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 그 차이는 시대와 문화가 다르기에 남겨진 유산도 다르다는 것이다. 폐사지에 서 있는 미륵불은 하늘재의 허전함을 채워주는 상징이기에 더 반갑고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다. 충주 미륵대원지의 미륵불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와 좁고 긴 사지로 인해 미륵불을 미륵세상처럼 우러러 보기 때문이다. 미륵불 위에 태양 위치할때, 미륵불을 바라보면은 광배의 후광보다도 더 강렬한 역광에 미륵불이 더 신비롭게 보인다. 마치 미륵당의 석축 위로 솟아 올라 하늘에 떠있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면서 석등의 후레임 속에 미륵불의 얼굴은 담지기도 하지만, 석등과 미륵불과 태양을 일직선으로 담지 못하는 것도 강렬한 역광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