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읍성을 지나며
산골어부
언양읍성을 지나며
떠나기가 아쉬워
돌고 또 돌고,
너무나 아쉬워서
돌았습니다.
2021년 1월에도
언양읍성이 있었기에
돌고 또 돌다가
사진도 남기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섰습니다.
언제일런지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텅 빈 터를
두 눈과 머리 속에
기억과 상상으로만 남기며
흐트러진 채로 그대로만 있기를 ~~~~~~
잘 보존된 언양읍성이
10년만 더 기다려 준다면
그 가치가 10배는 될 것같은 예감.
조선시대의 언양읍성이 아니라,
언양읍성이 그대로 남기를 ~~~~~
2020. 1. 14
#잘못된 복원보다는 성돌을 그대로 두고 역사공원으로 재탄생하기를 ~~~~~~
#세트장처럼 변하지 않기를 ~~~~~
[참고자료]
울산 언양읍성
해자(海子)로 성벽 외곽을 방어한 언양읍성
일반설명
언양읍성(사적 제 153호)은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와 서부리 일대의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석축성으로 네모반듯한 평지성이다. 둘레 1,559.7m으로 성벽의 현재 남아 있는 최고 높이는 4.85m이다. 읍성의 동서남북 성벽 중앙에는 옹성(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을 두른 성문이 배치되었다. 또한 각 성문의 좌우와 성벽이 꺾이는 모서리마다 성벽에서 돌출되게 쌓아 성 밑에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시설인 7m~8m×8m~10.4m 규모의 사각형 치성을 배치하고 성벽 바깥에는 해자와 뾰족한 말뚝인 목익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조선시대 평지읍성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성벽 둘레 1,427척, 높이 8척 규모의 토성으로 축조하였으며 군창이 있고 웅덩이 4곳과 우물이 2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성은 연산군 6년(1500년) 당시 현감이었던 이담룡이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이다. 고쳐 쌓는 과정에서 기존보다 더 넓게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읍성 내부에는 각종 관아시설이 있었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종 11년(1411년)의 기록에 의하면 언양 객사가 불에 타 수리하였다는 내용이 보이며, 동헌은 성종 21년(1490년) 6월 7일자 기록에 의하면 언양현 관아가 불에 타버렸으며, 명종 4년(1549년)에는 언양의 관사를 신축한 내용이 적혀 있다.
축조과학
성벽의 기초는 우선 생토층에 막돌이나 자갈돌을 깔아 지반을 다졌는데 북쪽 성벽의 경우 생토층에서 나무말목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되어 성벽의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외벽의 판돌 안쪽의 뒤채움 돌은 장대석을 길이방향으로 배치하여 면석이 무너져도 성벽 자체는 유지될 수 있도록 쌓았다. 내벽의 성 안쪽과 성벽 윗부분을 흙으로 덮어 마무리하였는데 이는 세종 20년(1438년)에 반포된 석성 축조에 관한 <축성신도>의 전반적인 내용과 대체로 일치하며, 빗물로 인한 성벽 유실방지와 유사시 성벽 위쪽으로 병사들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벽의 석축 너비는 5.5m내외로 그 안쪽 너비 1.5m의 흙으로 덧대어 다진 곳까지 치면 7m에 달한다. 외벽 바깥 바닥에는 성벽 기초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1.5~2m정도 너비로 판석을 깔아 보축 하였다. 성벽 안쪽으로는 지대석을 얹고 30cm 뒤로 물려 성벽을 쌓았는데 외벽 면석은 대형의 판돌로 세워쌓기와 눕혀쌓기 하였다. 외벽 면석에서 안쪽으로 2.5m 정도는 비교적 큰 돌로 채우고 있으며 내벽으로 갈수록 그 보다 작은 크기의 돌을 사용하고 있다. 내벽 석축의 성 안쪽으로는 너비 1m~1.5m 정도로 성벽 위까지 흙으로 경사지게 다져 마무리하였다. 성벽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대시키는 시설인 해자가 설치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울산 언양읍성 - 해자(海子)로 성벽 외곽을 방어한 언양읍성 (국립중앙과학관 - 우리나라 성곽축조과학)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 경상도(慶尙道) 언양현(彦陽縣)
동쪽으로 울산군(蔚山郡)의 경계까지 19리, 남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28리, 청도군(淸道郡) 경계까지 31리이며, 북으로 경주부(慶州府)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거지화현(居知火縣)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헌양헌(巘陽縣)으로 고쳐 양주(良州)의 속현으로 했고, 고려 현종 때 울주(蔚州)에 예속시켰다. 인종(仁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개칭하였는데, 본조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하고,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거지화(居知火)ㆍ헌양현(巘陽縣)ㆍ헌산현(巘山縣).
【성씨】 본현 박(朴)ㆍ김(金), 현(玄)ㆍ최(崔)ㆍ김(金) 모두 내성(來姓)이다.
【산천】 고헌산(高巘山) 현의 북쪽 10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취서산(鷲棲山) 현의 남쪽으로 12리에 있으며, 대석산(大石山)이라고도 한다. 석남산(石南山) 현의 서쪽으로 27리에 있다. 천화현(穿火峴) 현의 서쪽 28리에 있으니, 밀양부(密陽府)와의 경계이다. 부로산(夫老山) 현의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송동(松洞) 현의 북쪽으로 2리에 있다. ○ 김취려(金就礪)가 어릴 때 놀던 곳으로, 손수 심은 소나무가 아직도 있으며, 혹은 무덤이 송동의 안에 있다고도 하지만 지금은 알 길이 없다. 남천(南川) 현의 남쪽으로 1리에 있으며, 물의 근원은 석남산에서 나와서 울산군(蔚山郡) 대화진(大和津)으로 흘러 들어간다. 취성천(鷲城川) 현의 남쪽으로 10리에 있으며, 물의 근원은 대석산에서 나와서 여남천(與南川)과 합류하여 대화진으로 흘러 들어간다.『신증』 가사현(加士縣) 현의 서쪽 31리에 있으니, 청도군과의 경계이다.
【토산】 쇠 석남산에서 난다. 표고[香蕈]ㆍ송이[松蕈]ㆍ석이버섯ㆍ석청[石淸蜜]ㆍ지황(地黃), 참외[苽] 북쪽 성 밑에서 난다. 그 종자가 서울의 적전(籍田 임금이 손수 경작하는 밭)에서 나왔으므로 적전 참외[籍田苽]라고 한다. 매년 겨울철에 심었다가 4월 그믐 전에 임금께 진상해 들이는데, 그 심고 기르기가 매우 어려움으로 성종(成宗) 초에 없애 버렸다. 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석류(石榴). 『신증』 죽전(竹箭).
【성곽】 읍성(邑城)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1천 4백 98자이고, 높이는 8자이며, 안에 우물 2개가 있다. 『신증』 홍치(弘治) 경신년에 돌로 다시 쌓았으며, 둘레는 3천 64자, 높이는 13자이고, 안에 3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부로산 봉수(夫老山烽燧) 남쪽으론 양산군(梁山郡) 원적산(圓寂山)에 응하고, 북쪽으론 경주 소산(所山)에 응한다.
【역원】 덕천역(德川驛) 현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신원(新院) 현의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저촌원(猪村院) 현의 남쪽으로 24리에 있다. 우천원(于川院) 현의 북쪽으로 11리에 있다. 석남원(石南院) 석남산 아래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현의 동쪽으로 1리에 있다.
【불우】 석수사(石水寺) 부로산에 있다. 연고사(連高寺) 고헌산(高巘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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