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은 ?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咸昌邑)에 전승되는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진한의 소국으로 추정될 뿐이다.
마한과 백제 또는 고구려, 진한과 신라, 변한과 가야라는 잘못된 인식과
삼한과 삼국이란 개념이 후대의 기록에서는 ~~~~~~
삼국사기 잡지 지리 신라
상주(尙州) 고령군(古寧郡)
고령군(古寧郡)註 165은 본래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註 166으로 신라가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註 167고릉현(古陵縣)이라고도 한다.으로 삼았다.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함녕군(咸寧郡)註 168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셋이다.
가선현(嘉善縣)註 169은 본래 가해현(加害縣)註 170으로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가은현(加恩縣)註 171이다.
관산현(冠山縣)註 172은 본래 관현(冠縣)註 173관문현(冠文縣)이라고도 한다.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문경현(聞慶縣)註 174이다.
호계현(虎溪縣)註 175은 본래 호측현(虎側縣)註 176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註) 165
고령군(古寧郡):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咸昌邑).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고동람군(古冬攬郡)을 고령군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광종 15년(964)에 함녕군(咸寧郡)으로 바꿨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상주목(尙州牧, 현 경상북도 상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그 뒤에 함창군(咸昌郡)으로 바꾸었다.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파견하였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상주목 함창군).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함창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함창현). 그 중심지는 현내면이었던 교촌리, 구향리, 증촌리, 오사리, 오동리, 태봉리 일대로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신라 때의 중심지는 이안천 남쪽의 오봉산성과 신흥리고분군 일대일 가능성이 크다.
註) 166
고령가야국(古寧加耶國): 신라에 복속되기 전 고령군(古寧郡, 현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에 있었던 ‘국(國)’. 그것을 가야의 국이라고 한 것은 『삼국유사』 기이편 오가야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실제로 가야에 속했다기보다 신라 말 이후 고령, 즉 함창 지역의 토착 세력이 반(反) 신라적인 명분을 제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일조각, 72~74쪽). 경덕왕 때 고동람을 한식(漢式) 지명인 고령으로 고친 것인데, 이것이 원래 고령가야였다고 한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함창읍에 고령가야 태조의 왕릉으로 전하는 무덤이 있지만, 이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함창현 고적조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것으로, 역시 후대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註) 167
고동람군(古冬攬郡): 신라 고령군(古寧郡, 현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 고릉현(古陵縣)이라고도 하였다.
註) 168
함녕군(咸寧郡): 신라 기산현(耆山縣, 현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의 고려 광종 15년(964) 이후 이름. 그 뒤 어느 시점에 함창군(咸昌郡)으로 바꾸었는데, 본서 지리지에는 함녕군이 반영되어 있다.
註) 169
가선현(嘉善縣):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加恩面).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가해현(加害縣)을 가선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초[태조 23년(940)]에 가은현(加恩縣)으로 바꿨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상주목(尙州牧, 현 경상북도 상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공양왕 2년(1390)에 문경군(聞慶郡, 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에 감무(監務)를 두고 가은현(加恩縣)을 소속시켰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상주목 가은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문경현). 그 위치는 문경현 남쪽 41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문경시 가은면, 농암면에 해당한다. 중심지는 가현면(加縣面)이었던 성저리, 성유리, 전곡리, 수예리, 민지리 일대로 파악된다. 성저리에 가은산성이 있고, 농암면 농암리에 견훤산성이 있다. 이들 중 하나가 신라 가선현의 중심적인 산성이었을 것이다.
註) 170
가해현(加害縣): 신라 가선현(嘉善縣, 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
註) 171
가은현(加恩縣): 신라 가선현(嘉善縣, 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의 고려 태조 23년(940) 이후 이름. 위의 가선현 참조.
註) 172
관산현(冠山縣):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 문경읍.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관현(冠縣)을 관산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초[태조 23년(940)]에 문희군(聞喜郡)으로 바꿨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상주목(尙州牧, 현 경상북도 상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뒤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공양왕 2년(1390)에 감무(監務)를 두고 가은현(加恩縣)을 소속시켰으며,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縣監)으로 고쳤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상주목 문경군;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문경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문경현). 그 중심지는 읍내면이었던 상리, 하리, 교촌리, 요성리, 지곡리, 마원리 일대로 파악할 수 있으며, 마원리 요성(聊城)을 관련된 산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註) 173
관현(冠縣): 신라 관산현(冠山縣, 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
註) 174
문경현(聞慶縣): 신라 관산현(冠山縣, 현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의 고려 태조 23년(940) 이후 이름. 위의 관산현 참조.
註) 175
호계현(虎溪縣): 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虎溪面).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호측현(虎側縣)을 호계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이후에도 그대로 불렀으며, 현종 9년(1018)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상주목(尙州牧, 현 경상북도 상주시)의 속현이 되었다. 조선 태종 16년(1416)에 문경현에 내속(來屬)시켜 직촌(直村)을 삼았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경상도 상주목 호계현;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문경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경상도 문경현). 『신증동국여지승람』 문경현 고적조에 호계폐현이 현 동남쪽 40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문경시 호계면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도 중심지는 호현면(虎縣面)이었던 견탄리, 별암리, 호계리, 우로리, 막곡리, 구산리 일대로 파악된다. 문경 고모산성이 호계현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註) 176
호측현(虎側縣): 신라 호계현(虎溪縣, 현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의 경덕왕 때 고치기 전 이름.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1 태조 10년(927) 8월조에 “배산성을 보수하고 정조(正朝) 제선(悌宣)에게 병사 2개 부대를 거느리고 지키도록 명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기이 5가야(五伽耶)
아라(阿羅)야(耶)라고도 한다. 가야 註 352 지금의 함안(咸安), 고령가야(古寧伽耶)註 353 지금의 함녕(咸寧), 대가야(大伽耶)註 354 지금의 고령(高靈), 성산가야(星山伽耶)註 355 지금의 경산(京山)註 356이니 [혹은] 벽진(碧珍)이라고도 한다., 소가야(小伽耶)註 357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本朝)의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태조 천복(天福)註 358 5년 경자(庚子)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니註 359 1은 금관 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이요, 2는 고령 가리현(加利縣)註 360이 되었다.이요, 3은 비화(非火)지금의 창녕이란 것은 아마도 고령의 잘못인 것 같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 앞과 마찬가지로 성산은 벽진가야라고도 한다.이다.”라고 하였다.
註) 352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에 위치했던 나라이다. ≪삼국사기≫ 권48 열전8 물계자(勿稽子)조에서는 ‘아라국(阿羅國)’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 에서는 안라국(安羅國)이라고도 하였다.
註) 353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일대에 위치했던 나라이다. 고령가야는 가야의 강역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된 나라라 하기도 하고, 경상남도 진주로 비정하기도 한다(이병도, 「가라제국과 연맹체」, ≪한국고대사연구≫, 1976).
註) 354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일대에 위치했던 나라이다. 시조는 이진아시(伊珍阿豉)로, 5세기 가야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에 보이는 반로국(半路國)으로 생각된다.
註) 355
성산이라는 지명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처음 생긴 이름이다(≪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강주 성산군) 따라서 이 지역에 위치했던 나라를 두고 성산가야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경덕왕대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72~73쪽).
註) 356
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 일대이다.
註) 357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에 위치했던 나라이다.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한조의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일본서기(日本書紀)≫ 의 고착국(古嵯國)으로 생각된다.
註) 358
후진(後晋) 고조의 연호로 936~943년에 사용하였다.
註) 359
≪가락기(駕洛記)≫와 ≪본조사략(本朝史略)≫에 5가야의 명칭이 다른 것은 각각 금관가야(金官伽倻)와 대가야(大伽倻)가 중심이었던 시기의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311~313쪽).
註) 360
가리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에 있었던 현의 이름으로, 신라 때는 일리군(一利郡)이었다가 경덕왕 때 성산군(星山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때 가리현이 되었고 현종 때 경산부(京山府)에 소속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8 성주목(星州牧)) 성산군은 성산가야(碧珍伽耶)의 땅이었으므로 가리현을 고령가야(古寧伽耶)에 비정한 것은 ≪사략(史略)≫ 저자의 잘못으로 보기도 하고, 고령가야가 상주군 함창에서 고령군 성산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고려사 지리지
상주목(尙州牧) 함창군(咸昌郡)
함창군(咸昌郡)은 본래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으로, 신라(新羅)가 차지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고릉군(古陵郡)이라고도 한다.】이 되었다. 경덕왕(景德王) 때 고령군(古寧郡)으로 고쳤다. 광종(光宗) 15년(964)에 함녕군(咸寧郡)이 되었다. 현종(顯宗) 9년(1018)에 〈상주목에〉 내속(來屬)하였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명종(明宗)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상주목 함창현
본디 고령(古寧) 가야국(伽倻國)인데, 신라에서 취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을 만들었고, 경덕왕이 고령군(古寧郡)으로 고쳤다. 고려 광종(光宗) 15년 갑지에 함녕군(咸寧郡)으로 고쳤고, 【바로 송(宋) 태조(太祖) 건덕(乾德) 2년이다. 】 현종 9년 무오에 상주(尙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함창군(咸昌郡)으로 고쳤으며, 명종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상주목 함창현
동쪽은 상주의 경계까지 8리, 남쪽은 같은 주의 경계까지 17리, 서쪽은 같은 주의 경계까지 23리, 북쪽은 문경현의 경계까지 7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이었는데, 자세한 것은 김해부 산천 조를 보라. 신라가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으로 하였다가 고릉(古陵)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에 고령으로 고쳤다. 고려 광종(光宗) 때에는 함녕(咸寧)으로,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명종 때에는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때에는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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