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의 옛지명은 어떻게 변천되었을까 ? 유구한 역사 속에서 충청도의 대명사인 충주가 중소도시로 전락하고, 오늘날 그 자리를 대전과 청주가 대신하여 대청도로 변해가고 있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멀지않아 청충도와 대천도로 바뀌지는 않을까 ? 이는 충청도의 역사 속에서도 나타난다.
금강유역의 대청호란 명칭은 대전과 청주가 합성된 것으로, 충주호와 청풍호가 합치면 충풍호가 된다. 대림산성에 올라 해괴한 망상을 하면서도 씁쓸하다. 하지만 남한강과 달천강이 흐르듯이 역사는 흐른다. 명품도시란 정치인들이 좋아하는 인구가 많은 대도시가 아니라 산세가 수려하고 지역민심과 자긍심이 높은 작은 도시일 것이다. 예향이란 지역의 특성에 따른 잠재력을 창출한 도시는 아닐까 ?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왕조의 흥망과 전란으로 사라지듯이 지방의 작은 역사도 지역정서에 따라 그 운명을 달리한다.
삼국시대의 국원성과 중원경의 위치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충주성과 충주산성의 위치도 사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고, 그들이 주장하는 논문의 근거도 신뢰성이 없는 자료들 뿐이다. 충주성의 위치가 시대에 따라 옮겨졌기에 특정지역만을 거론하는 것은 크나큰 모순에 봉착할 수 있다. 충주성에 대한 연구논문들도 마찬가지다. 기록과 흔적조차도 없는 유적지에서 성의 길이와 성의 규모를 멋대로 추정하고 신뢰성도 없는 논문자료들을 제시하며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시켜 버린다.
멀고 먼 옛날에 충주의 중심이 국원성(중원경)인 가금면 중앙탑 부근에서 남한강과 달천강의 남동쪽인 현재의 충주로 옮겨진 것은 무엇 때문일가 ? 국경분쟁에 따른 방어개념에서 행정구역을 통치하는 개념으로 변하면서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교통로가 계립령에서 조령으로 이설되고, 군사력보다는 지방행정권이 충주지역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보련산성과 장미산성을 중심으로한 중원경에서 충주로 옮겨갔지만, 드넓은 달천뜰이 아니라 비좁은 구릉지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입지조건은 충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옛도시들이 이에 속한다. 한양의 천도와 경복궁의 풍수지리를 이야기할 때 명당자리를 언급하지만, 서울과 경기도 지도를 펴놓고 보면 북한산 자락의 비좁은 구릉지일 뿐이다.
삼국사기 지리편에서 나타난 고구려 지명을 국원성(중원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동쪽은 내토군(제천)과 사열이현(청풍). 서쪽으로는 잉홀현(음성)과 노음죽현(장호원) 남쪽으로는 잉근내근(괴산)과 상모현(연풍), 북쪽으로는 평원군(원주)이 기록된다. 고구려의 사열이현은 월악산 일대의 월천과 제천의 제천천이 남한강으로 합류하는 한수면과 살미면 일대로 현재는 충주댐 건설로 그 대부분이 충주호에 수몰되어있다. 사열이현은 삼국시대에 계립령과 죽령을 잇는 국원성 또는 중원경의 거점으로 덕주산성, 와룡산성. 망월산성, 남산성, 대림산성, 동악성 등이 산재하여 있다. 삼국시대의 국원성(중원경)의 중심이 고려와 조선시대의 충주목으로 이동하면서 고구려 사열이 또는 사을미의 중심인 한수면과 살미면에서 청풍면으로 옮겨가고 사열이현의 옛 지명들이 충주지역에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한강 유역의 중원문화권은 충주성(읍성)이라는 작은 것에 집착하여 중원의 역사를 상실하고, 중원문화권의 역사가 아닌 충주시 역사로 축소된 것은 아닌지 ~~~~
참고자료 - 三國史記 第 三十五卷(삼국사기 제 35권) 雜志 第 四(잡지 제 04)
中原京(중원경) : 중원경은
本高句麗國原城(본고구려국원성) : 원래 고구려의 국원성으로서
新羅平之(신라평지) : 신라가 이를 평정하여
眞興王置小京(진흥왕치소경) : 진흥왕이 소경을 설치하였고,
文武王時築城(문무왕시축성) : 문무왕 때 여기에 성을 쌓았는데,
周二千五百九十二步(주이천오백구십이보) : 둘레가 2천 5백 92보였다.
景德王改爲中原京(경덕왕개위중원경) : 경덕왕이 중원경으로 개칭하였다.
今忠州(금충주) : 지금의 충주이다.
介山郡(개산군) : 개산군은
本高句麗皆次山郡(본고구려개차산군) : 원래 고구려의 개차산군이었던 것을
景德王改名(경덕왕개명) :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今竹州(금죽주) : 지금의 죽주이다.
領縣一(령현일) : 이 군에 속한 현은 하나이다.
陰竹縣(음죽현) : 음죽현은
本高句麗奴音竹縣(본고구려노음죽현) : 원래 고구려의 노음죽현이었던 것을
景德王改名(경덕왕개명) :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今因之(금인지) :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槐壤郡(괴양군) : 괴양군은
本高句麗仍斤內郡(본고구려잉근내군) : 원래 고구려의 잉근내군이었던 것을
景德王改名(경덕왕개명) :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今槐州(금괴주) : 지금의 괴주이다.
黑壤郡(흑양군) : 흑양군은
一云黃壤郡(일운황양군) : 황양군이라고도 한다.
本高句麗今勿奴郡(본고구려금물노군) : 원래 고구려의 금물노군이었던 것을
景德王改名(경덕왕개명) :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今鎭州(금진주) : 지금의 진주이다.
領縣二(령현이) :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都西縣(도서현) : 도서현은
本高句麗道西縣(본고구려도서현) : 원래 고구려의 도서현이었던 것을
景德王改名(경덕왕개명) :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今道安縣(금도안현) : 지금의 도안현이다.
陰城縣(음성현) : 음성현은
本高句麗仍忽縣(본고구려잉홀현) : 원래 고구려의 잉홀현이었던 것을
景德王改名(경덕왕개명) :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今因之(금인지) :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北原京(북원경) : 북원경은
本高句麗平原郡(본고구려평원군) : 원래 고구려의 평원군으로서
文武王置北原小京(문무왕치북원소경) : 문무왕이 북원소경을 설치하였고,
神文王五年築城(신문왕오년축성) : 신문왕 5년에 성을 쌓았는데,
周一千三十一步(주일천삼십일보) : 둘레가 1천 31보였다.
景德王因之(경덕왕인지) : 경덕왕이 성의 이름을 그대로 지명으로 불렀다.
今原州(금원주) : 지금의 원주이다.
奈堤郡(내제군) : 나제군은
本高句麗奈吐郡(본고구려내토군) : 원래 고구려의 나토군이었던 것을
景德王改名(경덕왕개명) :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今堤州(금제주) : 지금의 제주이다.
領縣二(령현이) : 이 군에 속한 현은 둘이다.
淸風縣(청풍현) : 청풍현은
本高句麗沙熱伊縣(본고구려사열이현) : 원래 고구려의 사열이현이었던 것을
景德王改名(경덕왕개명) :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今因之(금인지) :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赤山縣(적산현) : 적산현은
本高丘麗縣(본고구려현) : 원래 고구려의 현이었는데
景德王因之(경덕왕인지) : 경덕왕이 이를 따랐다.
今丹山縣(금단산현) : 지금의 단산현이다.
대림산 정상의 측량 삼각점
대림산 정상의 봉수대터
대림산 정상의 봉수대터
대림산 정상의 봉수대터
대림산 정상의 봉수대터
대림산 정상의 봉수대터 석축
대림산 정상의 봉수대터 석축
대림산 정상의 봉수대터에서 바라본 충주시내
대림산 정상의 봉수대터에서 바라본 충주 남산
대림산성 북동측 무너진 토석혼축식 성벽
대림산성 북동측 무너진 토석혼축식 성벽
대림산성 북동측 치성터
대림산성 북동측 치성터
대림산성 북동측 치성터
대림산성 북문터
대림산성 북문터와 암석들
대림산성 북문지의 성벽 흔적
대림산성 북문지의 바위 전경
대림산성 북문지의 습지
대림산성 북문지 봉화골에서 바라본 충주시내
대림산성 북문지 서측 성벽
대림산성 북문지 서측 성벽
대림산성 북문지 서측 성벽
대림산성 북문지 서측 성벽
대림산성 북문지 서측 성벽
대림산성 북서측 성벽과 철탑임도
대림산성 북서측 성벽과 철탑임도
대림산성 북서측 성벽과 철탑임도
대림산성 북서측 성벽과 철탑임도
대림산성 북서측 치성터
대림산성 북서측 치성터
대림산성 북서측 치성터
대림산성 북서측 치성터
대림산성 북서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노루목
대림산성 북측 주능선과 송전선로
대림산성 북서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사천개와 충주시내
대림산성 북서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창골과 남문지
대림산성 북서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관주골과 충주시내
대림산성 북서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도장골과 모시레
대림산성 북서측 치성터에서 바라본 단월과 달천강
참고자료 - 지 명 유 래
본래 충주군 남변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관주동(貫珠洞)·도좌동(道左洞)·대제동(大堤洞) 일부를 병합하여 호암리라 하고, 구운리(九雲里)와 발티(發峙)로 병합하여 직동이라 해서 읍내면(邑內面)에 편입되었으며, 1931년 읍제실시에 의하여 호암동·직동으로 개편되고 1962년 호암·직 연합동으로 편제되었음.호암동(虎岩洞)▣ 호암-동(虎岩洞)【동】본래 충주군 남변면의 지역으로서 범바위가 있으므로 범바위 또는 호암(虎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관주동(貫珠洞), 도좌동(道左洞), 대제동(大堤洞) 일부를 병합하여 호암리라 해서 읍내면(충주시)에 편입됨.●관악-굴【산】관악사라는 절이 있었음.
●관주-골[관주동]【마을】범바위 서남쪽 약1㎞지점에 있는 마을. 마을서편에 구슬을 꿰 놓은 것 같은 형국의 산이 있다고 함.
●관주골-고개 [연주현, 비선동]【고개】관주에서 원호암으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에 연주선녀(連珠仙女)가 내려와 놀았다고 해서 일명 연주현비선동(連珠縣飛仙洞)이라 부르기도 함.
●대제-동(大堤洞)【마을】→ 수청골.
●대제-지(大堤池)【저수지】→ 함지못.
●도장-골 [도장굴, 도장동]【마을】관주골 서쪽에 있는 마을. 한적한 골짜기라고함.
●명당바우-고개 [명당암현]【고개】관주골에서 살미면 향산리 창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명당바우가 있었는데 도로공사로 없어졌음.
●명당사-터(明堂祠-)【터】명당바우고개에 있는 사당 터. 삼한 때 읍사(邑史)로 있던 안(安)씨의 시조가 명당바우에서 신선이 되었다하여 조선조 초에 이곳에다 명당사(明堂祠)를 세우고, 안씨 후손들과 육방관속들이 해마다 춘추로 제사를 지냈는데, 순종(純宗) 2년(1909)에 제사는 폐지되었으며, 명당사 고지기 집만 남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짐.
●명아-골 [명학골]【마을】관주골에 딸린 마을. 옛날 마을 뒷산에 학이 와서 울었다 함.
●범-굴【굴】사천이 막바지에 있는 굴. 옛날에 범이 살았다 함.
●범-바위 [호암]【바위】원호암 뒷산에 있는 바위. 모양이 범처럼 생겼음.
●봉화-골【마을】대림산 봉화뚝으로 올라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
●사실기-들【들】범바우 앞에 있는 들.
●사천-개【마을】현 남산초등학교 서편의 하천부근을 말함. 옛날 역촌으로 기와집이 4,000호나 있었다고 함. 또는 사씨(史氏)와 천씨(千氏)가 살았다는 설과 개울이 이 부근에서 네 갈래로 갈라져서 물을 끌어갔기 때문에 네갈래 냇물이라는 설과 신라시대 충주를 일명사천성(四川省)이라고 하였으며 사천성의 개울가라는 뜻으로 사천개라 하였다는 설도 있음.
●사천개-뚝【뚝】사천개에 있는 뚝.
●사천이-막바지【터】사천개 막바지에 있는 터.
▣ 직-동(直洞) [곧은골, 직곡]【동】본래 충주군 남변면의 지역으로서 곧은 골짜기로 되었으므로 곧은골 또는 직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운리(九雲里)와 발티(發峙)를 병합하여 직동이라 해서 읍내면(충주시)에 편입됨.●곧은-골【마을】→ 직동.
●구리미[구운리(九雲里), 구루미]【마을】자래바우 남쪽에 있는 마을. 지대가 높아서 마치 구름이 뜬 형국이라 함.
●구엉-말【마을】발티에 딸린 마을. 지대가 좀 낮은 곳에 있음.
●금봉산(錦鳳山)[남산(南山)]【산】안림동(安林洞)과 직동(直洞), 살미면(乷味面)과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636m. 죽림(竹林)이 울창해서 큰 날짐승이 많이 깃든다고 금봉산(錦鳳山)이라고 했는데 약 140년전에는 죽정사(竹亭寺)라는 절이 있었음. 산 정상에는 성터가 있고, 남산 3봉 밑에 창룡사가 있음.
난영이-고개 [난영이재]【고개】곧은골에서 살미면 난영이로 넘어가는 고개
●남산1-봉(南山一峰)[동그란남산]【산】원호암 동쪽에 보이는 봉우리. 제일 가까운 봉이 제1봉 두 번째가 제2봉, 세 번째가 제3봉으로 불리우고 있음. 일명 동그란남산이라고도 부름.
●남산-성(南山城)[마고성, 한미산성]【고적】남산에 있는 성터. 백제 구이신왕(久爾辛王) 때 축성하여 당시 국원성(國原城)이라 일컬어 오다가 신라 진흥왕(眞興王) 때 범장성(范 城)으로 고쳤다 하며, 조선사략에는 백제 개로왕 21년(475)에 이 산성을 쌓아 적을 막았다 하였으며, 비문에는 고려 때 자칭 국왕이라고 하는 자가 점거하고 있었다 하였으며 혹은 삼한 때 마고선녀가 7일 만에 축성하였다고도 하며, '마고성', '한미산성(漢美山城'이라고 함.
●매봉-재【산】대림산(大林山) 줄기에 딸린 산. 매사냥 때 망을 보던 산이라고 함.
●발-티(發峙)【마을】곧은골 동쪽에 있는 마을. 발티재 아래에 있음.
●발티-재 [발티현]【고개】발티 뒤에 있는 고개. 옛날 삼남대로로 통하는 대로의 첫 고개라 함.
●뱀-골【골짜기】자라바우에서 구루미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간 골짜기. 뱀처럼 길게 뻗침.
●봉화-터【터】대림산 정상에 있는 봉수터. 남쪽은 연풍 주정산, 서쪽은 이류면 마산에 응하였다함.
●성-재【고개】곧은골 북쪽으로 있는 고개. 산성으로 통하는 고개임.
●아래-뱀골【산】뱀골 아래쪽에 있는 산.
●웃-뱀골【산】뱀골 위쪽에 있는 산.
●자라-바우 [별암]【마을】직동교(直洞橋)가 있는 삼거리 부근의 마을. 묘역에 자라등처럼 생긴 자라바위가 있음.
●자라바우-들【들】자라바우 서북방의 들판.
●장자-골【골짜기】발티에서 남북으로 뻗친 골짜기.
●장자-번데기【고개】발티에서 향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죽정사-지【터】탑대마을에 현재 탑의 부재가 남아있으며 큰 절이 있었음.
●창룡-사(蒼龍寺)【절】곧은골 북쪽 남산에 있는 절. 약 1,100년 전에 창건하였으며, 그 뒤 여러번 중수하여 현재에 이름.
●탑-대(塔垈)【마을】발티 북쪽에 위치한 마을. 예전에 큰 절(竹精寺)이 있었고 현재 석탑이 2층까지 남아있음.
참고자료 - 충주시 살미면 향산리 지명유래
▣ 살미-면(乷味面)【면】본래 충주군 지역으로서 사을미곡(沙乙味谷)의 사자(沙字)와 을자(乙字)를 합하여 살미면이라 하여, 목벌(木伐), 문지(文旨), 대화(大化), 신당(新堂), 재오개(才五介), 무릉(武陵), 신릉(新陵), 신담(新潭), 공이(公耳), 매남(梅南), 내화(乃火), 보사(甫沙), 설운(雪云), 창동(倉洞), 대향산(大香山), 소향산(小香山), 두응(斗應)의 21개 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유등면(柳等面)의 팔봉리(八峰里) 일부를 병합하여, 목벌, 문화(文化), 재오개, 신당, 무릉, 공이, 신매(新梅), 내사, 설운, 용천, 세성, 향산의 12개리로 개편 관할함. 동쪽은 제천군 한수면, 남쪽은 상모면, 서쪽은 이류면, 북쪽은 호암동 등과 맞닿음. 1911년 4월 당시 살미면의 중앙인 내사리에 면사무소를 신축하였으나 교통관계로 인하여 같은해 10월 무릉리로 이전한 후 1924년 다시 세성리로 이전, 1974년 현 위치에 청사를 신축하여 사용해 오다가 1992년 5월 현재의 신청사를 신축하였음.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의 시 승격에 따라 중원군 살미면으로 불리워 오는 동안 1987년 1월 1일 목벌리가 충주시에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 상모면 문강리, 토계리가 살미면에 편입되어 19개 행정리로 구성돼 오던 중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에 따라 충주시 살미면으로 개칭되었음.
⊙ 향산-리(香山里)【리】살미면 법정리동의 하나. 충주군 살미면 지역으로 대향산과 소향산이 있으므로 향산이라 하다가 대향산리와 소향산리로 나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창동(倉洞), 두응리(斗應里), 유등면(柳等面) 팔봉리(八峰里) 일부를 합하여 다시 향산리라 함. 동쪽은 낭재를 넘어 재오개, 설운리와 접하고, 북쪽은 창동에서 단월동과 접하고, 남쪽은 세성리와 접하며, 서쪽은 이류면 문주리와 접함.* 향산 1리
●향산1-리【마을】향산리 행정리동의 하나. 자연마을은 아랫말, 장광, 웃말로 대향산이라 하며, 동쪽은 낭재를 넘어 재오개, 설운과 접하고, 서쪽은 소향산과 접하고, 북쪽은 대림산을 넘어 호암동과 접하며, 남쪽은 세성리와 접함.
●낭-재【고개】대향산에서 설운리, 재오개로 넘어가는 고개.
●생갱양-지【산】대향산 입구 왼쪽(북쪽) 양지에 있는 산비탈.
●신선-봉【산】대향산 입구와 세성리 좌수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325m.
●아랫-말【마을】대향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은진 송씨가 300년 세거함.
●옥녀-봉【산】아랫말 남동쪽에 있는 산(388m)으로 말안장 형국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함.
●웃-말【마을】대향산 마을 중 가장 안쪽에 있는 마을로 평택 임씨가 200년간 세거함.
●장-광【마을】아랫말과 웃말 사이에 있는 마을.
●큰나냥-이[대향산]【마을】향산 1리에 딸린 자연마을의 하나. 향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대향산이라고 함.
* 향산 2리
●향산2-리【마을】향산리 행정리동의 하나. 자연마을은 작은나냥이(소향산), 창동, 마장터로, 동쪽은 대향산과 접하고, 서쪽은 향산 3리와 접하고, 북쪽은 풍동, 단월과 접하며, 남쪽은 세성리와 접함.
●갯-들【들】노루목 밑, 달천과 용천천이 합수하는 곳으로 물이 차서 개흙이 많이 쌓여서 생김.
●노루-목【마을】달천과 용천천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마을로 산모양이 노루목처럼 생김.
●대림산봉수-대【봉수】창동 북쪽 대림산에 있는 봉수대로 주정산과 마산 봉수대를 연결함.
●마장-터【마을】향산초등학교 주변으로 옛날에 나무꾼들이 나무를 해서 말, 소에 싣던 곳.
●말마등【산】소향산 남서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448.1m.
●작은나냥-이[소향산]【마을】노루목을 돌아 3번 국도 구도로가에 있는 마을로 소향산이라고도 함.
●창-골(倉洞)【마을】단월동과 노루목 사이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큰 창고가 있었음. * 향산 3리
●향산3-리【마을】향산리 행정리동의 하나. 자연마을은 귀골, 하실, 세포로 북쪽은 달천을 건너 풍동과 접하고, 서쪽도 달천을 건너 이류면 문주리와 접하고, 동쪽은 소향산과 접하며, 남쪽은 두룽산을 넘어 세성리와 접함.
●귀-골【마을】노루목 서쪽 달천강변에 있는 마을로 음식점들이 있음.
●셋-개(細浦)【마을】귀골 서쪽에 있는 마을.
●셋개-나루【나루】셋개에서 팔봉으로 건너가는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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