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산성은 조선시대에도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조령을 넘어 서울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이 성은 임진왜란 때 문경새재를 넘어 온 왜군을 산성에서 숨었다가 돌과 폭약 등으로 산성 밑 길을 지나갈 때 공격하려 했으나 왜군이 이 계획을 알아차리고 성 밑을 지나지 않고 달래강 상류에서 강을 건너 맞은 편 풍동을 지나 충주시내와 탄금대로 진격하였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산위에서 칡넝쿨로 돌을 묶었 두었다가 적이 성 밑을 접근하면 일시에 칡넝쿨을 잘라서 돌이 성 밑으로 굴러내려가게 하여 적을 방어하려 하였으나 적이 접근하기 전에 돌을 굴려서 실패하였다고도 한다. 대림산성의 축성과 관련하여 최초의 기록 자료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이다. 이 기록에는 世宗大王實錄, 卷第百四十九 忠淸道 忠州牧 ‘大林山 州人以爲鎭山 上同書 烽火四處..大林城西淮馬山’ 라고 하여 이미 조선초기 세종대에 이미 대림산에 산성이 있었으며 이 곳이 봉화대로 사용되었음과 대림산이 충주의 진산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주목 성지조(條)에는 “大林山城: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638척(尺)이고 우물 하나가 있다. 지금은 폐하였다.”(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고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의 지리지 및 『문헌비고(文獻備考)』 등에는 이러한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기재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忠州 城池 ‘南十五里周九千六百三十八尺井一’’ 고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말기에 편찬된 『충청도 읍지(忠淸道 邑誌)』 忠州牧 에는 ‘烽燧 大林山烽燧 在州南十里南應延豊周井山西應馬山別將一人監官五人軍人一百人’ 라고 하여 대림산 봉수에는 별장 1명, 감관 5명, 군인 100명이 상주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 유적조사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충주면 호암리, 살미면 향산리 성지는 대림산성이라 집작되는 것의 일부로서 천험의 암벽을 이용하는 둘레 약 1,800칸(間)의 석성지로 거의 붕괴되어 도처에 瓦片이 산재하여 있다. 烽燧는 대림산 봉수라 짐작되는 원형의 석루 2단이 있다. 이단을 합한 현재 높이는 30척(尺)이고 규모가 크다.” 고 하였다.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攬)』에서는 “삼국시대 축조된 성으로 추정되며, 달천변의 험준한 산 위에 조령으로 통하는 대로를 막아 충주의 남쪽을 방어하는 요새로서 둘레는 약 5km 나 되며 봉수터(烽燧址)가 있다. 임경업 장군의 일화가 전해오고 있으며 또한 임진왜란 때에도 사용되었다. 현재 석성의 잔존 부분은 있으나 대체로 붕괴되었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瓦片)이 출토되고 있다.” 고 하였다. 『충청북도 문화재지(忠淸北道 文化財誌)』에서 이와 동일한 내용에 “성안에서는 신라계 및 백제계의 토기조각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중 백제계의 연질토기(軟質土器) 조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 하여 대림산성을 삼국시대에 축성한 산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전설 대림산성내에는 창골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으며 대궐터, 창터라고 불리는 경작지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백제의 개로왕이 대궐과 창고를 지었던 곳이라 한다. 대림산의 북서쪽 말단부에는 조선시대에 임경업(1594~1646) 장군이 무술 연마 차 올랐다는 단월대(일명 三超臺)가 있으며 삼국시대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월은사터에는 현재 정심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성(城) 이름의 유래 조선시대 편찬된 각종 기록에 대림산에 위치하고 있어 대림산성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정.
대림산성 내 시설물
본문
○규모 및 시설
대림산성은 둘레가 4,906m에 달하는 대규모의 산성으로 서쪽으로 강변을 임하는 곳을 향한 계곧을 둘러싸고 있다. 성으로 출힙하는 강변 도로는 절벽 아래로 잔도(棧道)를 이루고, 입구는 좌우의 절벽 위에서 내려다 보는 호구(虎口)를 이룬다. 부분적으로 석축을 하였지만 대부분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임이 밝혀졌다. 성벽의 높이는 대략 4~6m이고 산성의 곳곳에 치성(雉城), 망루(望樓), 장대(將臺) 등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가 발견되고 있다. 또한 산성 전제에서 여장(女墻)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림산성의 규모는 충주시 일원의 산성들에 비해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생각되며, 대부분의 산성들이 석축인데 비해 토석혼축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산성은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능선을 따라 길게 치성(雉城)을 축조한 것이 특징인데 긴 곳은 수백미터에 달할 정도이다.
그러나 산성의 축조 방법을 검토하여 볼 때, 석축(石築)으로 보강한 부분은 전체 10여개소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현존하는 석축 부분 중 성벽의 높이가 4m 정도 남아 있는 곳도 있지만 꼭 필요하거나 전략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아니면 석축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석축 방법은 네모 막돌 바른층 쌓기를 하여 표면을 다듬은 30~40cm 크기의 장방형의 성돌을 암반위에 올려놓고 뒤사춤 돌을 다져 넣어 가로줄눈이 거의 수평이 되게 하였다. 아래층과 위층은 아래층의 1/3정도가 윗돌에 맛물리도록 한 臣자형 쌓기를 시도하였으나 성벽의 아랫부분과 윗 부분의 성돌의 차이가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성벽을 쌓음에 있어 퇴물림쌓기를 하였으나 성돌의 크기가 일정치 않고 일부 구간의 성벽을 제외하고는 바른층 쌓기를 하지 않아 성벽의 안정성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토석혼축 부분의 경우도 성벽의 기단 부분만 석축을 하고 그 위쪽과 안쪽은 토축을 하였지만 토축 부분은 판축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삭토(削土)를 통해 생긴 흙을 할석(割石)과 함께 막다짐으로 다져 놓은 것으로 보아 이 산성은 짧은 기간 동안 급조된 산성이라고 판단된다.
○성문
성문은 동서남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문지를 제외하고는 그 흔적을 명확하게 있지 않다. 그러나 현재 산으로 오르는 진입로 부분에 어떤 형태로든 산성으로 진입하는 입구가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암문(暗門) 형태의 작은 성문이 하나 더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치성
대림산성의 경우 지형을 따라 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돌출 지점이 자연스럽게 치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특별히 각 방면으로 주된 능선을 따라 길게는 수백 미터부터 10여미터에 이르는 인위적인 치성을 설치하여 방어의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이처럼 특별히 치를 설치한 곳으로 판단되는 지점이 10개소가 있다. 그리고 이 10개소의 치성 외에도 자연지형을 따라 축성하는 과정에서 능선의 돌출된 부분에는 여러 개의 작은 치를 설치하여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지
성내의 건물지는 현재 10여개소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다. 현재 30여 호의 민가가 있는 성 내부의 곳곳에는 지휘소, 창고, 병사들의 숙소 등 산성의 방어와 관련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성내의 곳곳에서ㅗ 기와 조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많은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형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곳은 대궐 터라고 알려지는 지점과 그 일대이다. 이곳은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일부 시굴 결과 지표하 20cm 지점에서 초석이 나타나고 있다. 초석(礎石)은윗면이 판판한 할석을 이용하였으며, 직경 60~70cm 정도 크기이다. 초석 아래에는20~30cm 크기의 적심석들이 깔려 있다. 초석과 주변에는 많은 양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ㅇ리 발견되고 있는데, 대체로 고려시대의 청자편과 도기편, 그리고 어골문과 무문, 선조문, 격자문이 찍힌 평기와 편이 있으며, 암기와 편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대형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산성 정상부의 전망이 양호한 지점이나 산성이 굴곡을 이루는 모서리 부분에는 마치 치와 같이 외곽으로 돌출되도록 성벽을 축조하고 그 윗부분은 평탄하게 조성해 놓았는데 이런 곳마다 주변에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적대나 각루, 장대 등의 건물이 다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남문지쪽 해발 303.8m 지점의 구릉 정상부에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고, 주변에는 직경 60~80cm 정도의 초석이 노출되어 있으며, 봉화대 남쪽 해발 423m의 능선 정상부 평탄한 지역에도 역시 대형의 초석이 노출되어 있다
○우물지
산성의 방어와 관련하여 가장 기본적인 조건의 하나가 물이다. 대림산성은 비교적 수량이 풍부한 편이다. 산이 깊지 않지만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이 곳곳에 솟아나고 있어 많은 인원이 거주하더라도 식수나 생활용수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산성 내부에는 동쪽의 해발 0mㅡ 지점에서 발원한 개울이 산성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흘러 달천으로 유입되고 있으며, 주거지역과 산성을 방어하는 지역과의 표고차가 크기 때문에 산성의 방어시 물의 공급이 문제가 될 수 있으나 남문지 부근과 북쪽 성벽 안쪽의 해발 420m 지점에도 우물이 있어 장기적인 산성의 방어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대림산성에는 3개의 우물 터가 남아 있다.
○대림산 봉수터
대림산 봉수는 최초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타나는데世宗大王實錄, 卷第百四十九 忠淸道 忠州牧 ‘大林山 州人以爲鎭山 上同書 烽火四處..大林城西淮馬山’ 라고 하여 이미 조선 초기에도 대림산이 봉수대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충주목 성지조(條)에는 “大林山烽燧:남쪽으로는 延豊현 周井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馬山에 응한다.” 고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의 지리지 및 『문헌비고(文獻備考)』 등에는 이러한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기재되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忠州 城池 大林城 ‘南十五里周九千六百三十八尺井一’ 고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 忠原縣 烽燧條에 ‘在縣南十里南應延豊周井山西應馬山別將一人監官五人軍人一百名’ 조선시대 말기에 편찬된 『충청도 읍지(忠淸道 邑誌)』 忠州牧에 ‘烽燧 大林山烽燧 在州南十里南應延豊周井山西應馬山別將一人監官五人軍人一百人’ 라고 하여 봉수에는 별장 1명, 감관 5명, 군인 100명이 배속되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유적조사 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충주면 호암리, 살미면 향산리 성지는 대림산성이라 집작되는 것의 일부로서 천험의 암벽을 이용하는 둘레 약 1,800칸(間)의 석성지로 거의 붕괴되어 도처에 瓦片이 산재하여 있다. 烽燧는 대림산 봉수라 짐작되는 원형의 석루 2단이 있다. 이단을 합한 현재 높이는 척(尺)이고 규모가 크다.” 고 하였다.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攬)』에서는 “남으로 상모면 周井山에 응하고 서로는 이류면 馬山에 응했던 봉수이며, 대림산 상봉에 약 100㎡( 평) 정도의 평지만 있을 뿐이며 정상에는 묘소로 추측되는 봉분이 2개 있고 대림산 아래 창골에서 기와조각이 발견된다고 한다. 석루 2단, 현고 9m이다.” 고 하였다.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는 곳은 해발 487.5m 지점으로 대림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동쪽으로 남산성이 잘 바라다 보이고 북쪽으로는 충주시내가 그리고 서쪽으로는 달천 일원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3번 국도와 달천 상류 쪽이 멀리 조망되고 있다. 이곳은 정상부를 삭토하고 둘레를 보축하여 평탄지를 확보하였는데 정상부는 남죽이 약간 길쭉한 타원형이며, 직경은 장축 20m, 단축 16m로 내부 면적은 약 100평 정도이다. 정상부는 평탄하고 흙으로 덮혀 있어 봉돈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는데 중간 부분에 민묘로 보이는 봉분이 3기가 있다. 또한 봉화대를 돌아가며 길이 2m, 폭 1m, 깊이 1m 정도의 예비군 참호가 2~3m 간격으로 8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예비군 참호의 벽면을 통해 볼 때 전체가 석축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정상부를 따라가면서 축조된 석축의 높이는 1~1.5m이며, 20~ m 정도의 석재를 이용하여 허튼층 쌓기를 하였다. 석축 아래 부분은 9m 정도 높이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외곽에서 정상부쪽으로 폭 3m 정도의 도로가 나선 모양으로 봉화대를 두 번 감싸고 돌며 정상부로 연결되고 있다. 봉화대 주변에는 조선시대의 토기편과 백자편이 일부 수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