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의 흐느낌
달천에서 상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탄금대(彈琴臺)를 볼 수 있다.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작은 산 위에 있는데,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서 남한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탄금대는 말 그대로 가야금을 타는 곳인데, 신라 진흥왕 때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전한다. 탄금대는 절묘한 풍경과 함께 수많은 역사의 한은 남기고 있다.
싸움 진 그 해 무수한 사내 묻혔으니
오늘까지 마른 해골 평원에 가득하네
나누어 두 무덤 이뤘으나 누구 것인지
삼형(三刑)을 범했거나 뜻 굽히지 않았네
차가운 달 강물 비치니 원기가 흐느끼고
슬픈 바람 대지 떨구니 깃든 새 우짖는다
삼성(參星)이 떨어지려 하니 나그네 떠나가고
푸른 도깨비불 허공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네
戰敗當年沒萬夫
至今枯骨滿平蕪
分成二塚終誰主
共犯三刑或不誣
寒月照江?鬼泣
悲風拂地宿禽呼
參星欲落行人去
碧燐憑虛乍有無
임숙영(任叔英 : 1576∼1623)의 「달천(達川)의 전쟁터를 지나며」란 제목의 시이다. 그는 지평(持平)까지 지낸 조선중기 때의 문인이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 : 1546∼1592)이 소수의 군사로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패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은 비록 우리의 승전(勝戰)으로 끝은 맺었지만, 왜구의 말발굽에 전국이 초토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물적으로나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 이 시가 지어진 시점이 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이 지나서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아직도 그 때의 상처가 채 가시기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들판에 나뒹구는 유골이며 푸른 강물에 어린 원귀(寃鬼)의 흐느낌은 섬뜩함으로 다가온다. 탄금대는 신립을 비롯하여 수많은 충의군(忠義軍)의 생명을 앗아간 곳이다. 울부짖는 탄금대의 물살은 실제 강의 물살이 갑자기 바뀌는 곳으로 상류에서 흘러오는 물이 잘 빠지지 않아 잦은 범람으로 이어지곤 하였다. 그 역시 충의군의 서린 한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는지.
탄금대 전투에서 패전의 책임을 따지는 시도 있다.
당시의 패전은 장군 지모 없어서니
의롭고 충성스런 혼백의 한 그치지 않네
울부짖는 탄금대 아래 물결이여
다만 한강수에 부끄러울 뿐이구려
當時一敗將無謀
義魄忠魂恨未休
嗚咽彈琴臺下水
碧應羞向漢江流
이 시의 작자 조찬환(趙纘韓 : 1572∼1631)은 영천군수(榮川郡守)로 있을 때 각지에 도적들이 날뛰자, 삼도토포사(三道討捕使)가 되어 이를 토벌하는 등 문무를 겸한 인물이었다. 그는 뒤에 광해군의 실정(失政)에 반대하여 외직을 청했고, 인조반정 후 형조참의에 오를 정도로 용렬(勇烈)한 기개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볼 때 탄금대 전투의 패배는 신립 장군의 고집과 무지가 낳은 결과였다. 1592년 4월,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한 왜군이 강한 기세로 북상하자, 조정에서는 명장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험악한 조령(鳥嶺)의 지형을 이용, 왜적을 격퇴하려 하였다. 그런데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패하여 돌아오자 신립 일행은 충주로 후퇴, 충주 북서쪽 4㎞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고니시를 맞아 싸웠다.
당시 신립 작전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왜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기 때문에 넓은 들판에서 싸우면 빠른 기동력을 가진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 조령(鳥嶺 : 새재) 같은 산속에는 기병이 힘을 발휘할 수 없고, 활쏘기가 어렵다. 또한 왜군의 척후가 이미 조령까지 왔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조령에 진을 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종사관 김여물의 생각은 달랐다. `왜적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천혜의 요소인 조령에 매복했다가 적이 골짜기에 들어왔을 때 공격을 하면 적을 섬멸할 수 있다. 그리고 새재에서 적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물러나서 다시 한 번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지휘관은 신립이었고 그의 뜻에 따라 탄금대에서 전투가 치러졌다.
탄금대에서 진을 치는 과정에서도 조선군은 큰 실책을 저질렀다. 동에서 서로 남한강이 흐르고, 남에서 북으로 달천이 흘러 만나는 지점이 합수머리이고 그 남쪽 낮은 산이 탄금대였다. 탄금대는 북쪽으로 강과 맞닿아 절벽의 형태이고, 남쪽으로는 완만한 구릉과 논밭이 펼쳐져 있다. 높은 지역에 자리를 잡고 낮은 지역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물리친다는 것은 전투의 상식에 속하지만, 퇴로가 없는 상황에서는 아주 위험할 수 있다. 이날 왜군이 동쪽과 남쪽에서 공격해 왔기 때문에 조선군은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배수진을 쳐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도록 하겠다는 신립의 생각은 병법에 나오는 좋은 계책이기는 하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공허한 전술에 불과했다. 신립과 김여물 등 지휘관은 앞장 서 싸웠지만,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병사들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었다. 결국 탄금대 전투의 패배는 한양으로 가는 보루가 무너짐으로써 초반 전쟁의 판도를 극도로 힘들게 하였다.
탄금대 전투를 배경으로 지어진 『달천몽유록(達川夢遊錄)』이라는 소설이 있다. 조선 중기 문인 윤계선(尹繼善)이 지은 한문소설로 당시 전투에서 나라를 위하여 전사한 충신들을 추모하여 지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주인공 파담자(波潭子)는 호서지방을 암행하라는 임금의 봉서(封書)를 받고 여러 읍을 거쳐 충주의 달천(達川)에 이르렀다. 이 곳에서 파담자는 임진왜란이 남긴 처참한 광경을 보고 시 3수를 지어 비분강개한 마음을 풀다가 잠이 들었다.
그는 꿈속에서 큰 나비의 안내를 받아 임진왜란 때 희생된 여러 영령들이 넋두리하며 노래 부르는 광경을 엿보았다. 파담자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과 합석하니,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 가운데 세상에 전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천하의 요새인 죽령(竹嶺)을 끝내 지키지 못한 신립(申砬)에 대한 원망을 말하자, 이에 대한 신립의 변명이 이어지고, 다시 성패에는 이미 운수가 정해져 있었으니 지금의 시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화해의 이야기가 오갔다.
이 때 노주(蘆洲)에서 닻줄을 풀고 내려오는 한 장군을 모두 일제히 영접하였다. 각자 좌석이 정하여지자 산해진미를 좌우에 나열하여 놓고 풍악을 울리며 향연이 시작되었다. 화기가 애애한 가운데 모든 사람이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를 하며 시를 읊는다.
장군도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의 전사(戰死)를 이야기하며 시를 읊는다. 장군의 시 읊기가 끝나자 마지막으로 승장이 읊으니, 장군이 웃으며 칭찬하고는 피담자에게 화답하라고 한다.
파담자가 여러 사람을 품평(品評)한 글을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올렸다. 좌우에 앉은 혼령들은 그의 문장이 나라를 빛낼만하고 무예와 용맹은 외적을 막을만하다고 칭찬하면서 나라의 일에 힘써달라고 부탁한다. 파담자는 "가르침대로 하겠다."고 말한 다음에 물러 나온다.
긴 시냇가에서 여러 귀신들이 손뼉을 치며 웃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원균(元均)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파담자 역시 크게 웃고 조롱하다가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윤계선은 『달천몽유록』의 끝에 꿈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명을 관작(官爵)에 따라 밝혀놓았다. 즉, 장군은 이순신(李舜臣)이요, 고첨지는 고경명(高敬命), 황병사는 황진(黃進), 심감사는 심대(沈岱), 승장은 영규(靈圭)라고 써놓고 있다.
그런데 탄금대 전투의 패전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작품도 있어 흥미롭다. 바로 조선 중기 문인이었던 황중윤(黃中允)이 지은 한문소설인 『달천몽유록』이다. 그의 가장(家狀)에 밝혀진 창작 동기는 그가 증광시(增廣試)를 보고 돌아오는 중 장마에 막혀 충주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머물다 꿈을 꾸고서 지었다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이 용궁[水府]에 초대되어 갔다. 거기서 용왕과 함께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고 있는데, 신립 장군이 함께 합석하였다. 신립은 자신에 대해 세상이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었다. 주인공은 탄금대 패전이 신립 장군의 지혜가 부족해서 생긴 결과라고 알고들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신립은 탄금대 배수진은 결전의 의지를 보인 것이며, 패전 역시 정예병이 없었던 사회적 제도 때문이라고 항변하였다. 이어서 신립의 동생도 형의 편을 들어 탄금대 패전은 병농일체(兵農一體)의 병제(兵制)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용왕이 곡을 연주하고 신립과 신길, 다른 선비들이 함께 글을 지었다. 주인공도 함께 글을 짓고 용왕으로부터 "수년 안에 청운에 오른다"는 덕담과 함께 사자의 인도로 용궁을 나왔다.
그러자 신립은 탄금대 배수진은 결전의 의지를 보인 것이며, 패전 역시 정예병이 없었던 사회적 제도 때문이라고 항변하였다. 이어서 신립의 동생도 형의 편을 들어 탄금대 패전은 병농일체(兵農一體)의 병제(兵制)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용왕이 곡을 연주하고 신립과 신길, 다른 선비들이 함께 글을 지었다. 주인공도 함께 글을 짓고 용왕으로부터 "수년 안에 청운에 오른다"는 덕담과 함께 사자의 인도로 용궁을 나왔다.
이 작품은 탄금대 패전이 태평시대에 제도적 미비로 정예군을 얻지 못한 것이 패인이며, 결코 신립의 지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강한 톤으로 언급하였다. 앞서 든 윤계선의 『달천몽유록』은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선조 33년)에 창작된 작품이며, 이 황중윤의 『달천몽유록』은 그로부터 십여 년 후의 작품이다. 따라서 단순한 감정적 차원의 패전을 규탄하는 것이 벗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다 심층적 원인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패전의 근본적 원인을 당시의 사회제도나 병농제(兵農制) 등 모병(募兵)의 제도적 모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먼 세월이 지난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날의 논쟁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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